기업‧채권자 사전 자율협상 도입
기한이익 상실 등 ARS 단점 보완
신청부터 종료까지 비공개 원칙
‘워크아웃‧회생절차’ 병행도 가능
# 미국의 글로벌 렌트카 기업 허츠는 코로나19로 경영난에 처했지만, 사전 협상을 통해 구조조정에 관한 주요 내용과 조건을 약정하는 ‘구조조정 지원 약정’(RSA)을 거쳐 사전 협상 후 190억 달러(한화 약 26조 원) 부채를 조정하고 기업가치를 보존했다. 화장품 기업 레브론(부채 33억 달러)과 항공기 리스회사 노르딕 애비에이션 캐피털(63억 달러) 또한 같은 방식으로 위기를 극복했다.
우리 법원도 기업과 채권자들을 위해 회생절차 개시 없이 채무를 조정할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하기로 했다. 종전 회생 절차에서 따라오는 문제점들을 해결하기 위함이다.
워크아웃·회생절차 함께 진행…하이브리드 방식도
29일 법조계에 따르면 서울회생법원은 비공개 조정을 통한 구조조정 협상인 ‘Pre(프리)-ARS’를 다음달 1일부터 시범 실시한다. Pre-ARS는 재정적 어려움을 겪거나 그 우려가 있는 기업이 회생절차 신청 전에 법원의 민사조정 절차를 활용해 주요 채권자들과 비공개로 구조조정을 협상하는 제도다. 기업이 채권자들과 구조조정에 관해 미리 협상할 수 있는 예방적 구조조정이다.
새로 도입하는 ‘Pre-ARS’는 미국의 RSA와 일본의 ‘채무변제 협정 조정’ 등 선진국 제도를 벤치마킹했다. 프랑스 등 유럽연합(EU)에서도 예방적 구조조정 절차가 제도화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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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원은 기존에 자율 구조조정 지원(ARS) 프로그램을 운영해왔지만 회생절차 신청을 전제로 하기 때문에 기한이익 상실(EOD)이나 낙인 효과 등의 문제가 뒤따라왔다.
기한이익 상실이란 채권자가 채무자 기업에 빌려준 대출금을 만기 전에 회수하는 것이다. 채권자는 채권을 빠르게 회수할 수 있지만 기업 입장에서는 갑작스러운 경제적 부담이 생겨 정상 경영이 어려워질 수 있다. Pre-ARS 단계에서는 기한이익 상실이 발생하지 않아 기업이 정상 영업을 하면서 채권자와 협의할 수 있게 된다.
게다가 Pre-ARS 조정 절차는 ‘비공개 원칙’이어서 회생신청 기업이라는 꼬리표를 달지 않아도 된다. Pre-ARS 조정 절차는 신청부터 종료까지 외부에 알려지지 않는다. 법원이 조정에 참여하므로 비공개로 진행되더라도 공정성을 담보할 수 있다.
법원은 Pre-ARS를 활용해 기업과 채권자 간 사전 협상의 장을 새롭게 마련한다는 방침이다. 조정 재판부 재판장은 일단 정준영 서울회생법원장이 맡는다. 법원은 향후 Pre-ARS 신청 수에 따라 재판부 인력 구성을 변경한다는 계획이다.
기업 구조조정 업무를 전문으로 하는 허보열 법무법인(유한) 태평양 변호사는 “회생신청을 전제하지 않는 Pre-ARS는 채무자로 하여금 기한이익이 상실되지 않은 상태에서 법원의 조력을 받아 채무조정을 할 수 있도록 하는 제도라는 점에서 활용도가 높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Pre-ARS·하이브리드 구조조정, 높은 활용도 전망
Pre-ARS를 거쳐 채무조정 합의가 이뤄진다면 채무자 기업은 조정 신청을 취하하게 된다. 약정 합의가 이뤄지지 않았더라도 채무자 기업의 구조조정이 필요할 경우 회생 혹은 워크아웃 신청이 가능하다. 법원이 Pre-ARS와 함께 신설한 하이브리드 구조조정 신청 역시 가능해진다.
하이브리드 구조조정은 워크아웃과 회생절차를 병행할 수 있는 방식이다. 기존에는 기업이 구조조정을 신청하려면 워크아웃과 회생절차 중 하나를 선택해야만 했다. 이에 법원은 기업이 워크아웃과 회생절차의 장점만을 사용할 수 있도록 하이브리드 구조조정 절차를 도입했다.
허 변호사는 “하이브리드 구조조정 제도는 채권자들과 협의에 시간이 소요되고 당장의 강제집행을 막을 필요가 있는 경우 등 워크아웃의 원활한 진행을 위해 채무자 회생 및 파산에 관한 법률에 따른 일정한 지원이 필요한 채무자에게 활용도가 높을 것으로 보인다”라고 평가했다.
법원은 워크아웃과 동시에 회생 신청을 한 기업에 포괄적 금지 명령 및 포괄적 허가를 발령하고 회생개시 보류 결정을 내린다.
포괄적 금지 명령은 회생절차 개시 신청이 있을 때 법원이 채무자의 재산에 대한 모든 강제집행, 가압류, 가처분 등을 금지하는 명령으로 채권자 및 회생담보권자가 채무자 재산에 강제 집행을 할 수 없도록 하는 것을 말한다.
포괄적 허가란 기업회생 절차 중 법원이 정해놓은 특정 지출 행위 또는 지출액에 대해 별도의 허가 절차 없이 바로 진행할 수 있도록 허가하는 제도다.
두 제도를 이용해 기업이 최대한 정상 영업을 할 수 있도록 한다는 취지다.
정 법원장은 “내년 말 일몰 예정인 기업구조조정 촉진법상 워크아웃 제도를 유지하면서 법원이 회생을 적극 지원하기 위한 목적”이라며 “워크아웃과 회생절차의 장점을 결합한 ‘K-구조조정’ 제도가 탄생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윤희성 기자 yoonheesung@·박일경 기자 ekpar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