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재에 대한 사회적 대우 분위기 조성 필요
일한 만큼 제대로 보상하는 임금체계 개선
자유롭게 연구할 수 있는 환경 만들어야
반도체, 인공지능(AI) 등 미래 핵심 산업을 지탱할 인력 기반이 흔들리고 있다. 이공계 최상위권 학생들은 의대로 쏠리고, 양성된 유능한 인재들도 더 좋은 조건을 제시하는 해외 기업으로 떠나고 있다. 글로벌 기술 패권 전쟁이 심화하는 가운데 인재를 대우하지 않는 환경을 만들지 않으면 한국 산업의 근간이 무너질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전문가들은 미래 핵심 산업을 지탱할 인력 기반에 대한 대우와 함께 이공계 인재들에 대해 사회적으로 존중하는 분위기가 조성돼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국가 발전을 위해 헌신하는 인재들에게 걸맞은 처우를 제공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종환 상명대 시스템반도체학과 교수는 29일 “공부 잘하는 학생들이 의대로 몰리는 건 이공계 분야보다 사회적 대우나 보상 체계가 훨씬 좋기 때문”이라며 “미국, 중국, 대만은 오히려 의대보다 이공계를 더 많이 선호하고 우수 인재가 몰리는데 한국은 그 반대의 구조”라고 짚었다.
이 교수는 미국이나 중국 등은 첨단 산업 인재를 확보하기 위해 연봉을 한국보다 2~3배 높은 수준으로 책정하고, 사회적으로도 이들을 우대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그는 “해외에서는 이공계에서 일하면 굉장히 가치 있는 일을 하고 사회에 기여한다는 분위기가 형성돼있는데 한국은 그렇지 않다”면서 “좋은 인재가 한국에서 일하고 싶어지는 환경을 만들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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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기현 한국반도체산업협회 전무도 “기업들은 일한 만큼 제대로 보상하는 임금 체계를 마련하고, 정부는 국가 경제에 기여하는 이공계 엔지니어들을 위한 연금 제도 등을 고려해야 한다”며 “개인에게 희생을 강요하는 시대는 지났다”고 했다.
인재들이 자유롭게 연구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야 한다는 주장도 나왔다. 최병호 고려대 인공지능연구소 교수는 “해외 대학이나 기업에서는 인재들이 자유롭게 연구 아젠다를 제안하고, 그래픽처리장치(GPU) 같은 자원도 무제한으로 쓸 수 있다”며 “한국에는 그런 인프라가 전혀 없다”고 지적했다.
최 교수는 “지금처럼 연구비 지원이 적고, 연구 인프라가 열악한 상황에서는 아무리 인재를 뽑아도 해외로 나갈 수밖에 없다”면서 “차기 정부는 파격적인 연구 지원 정책을 마련해야 하고, 기업도 인재들이 자유롭게 주제를 선택해서 연구할 수 있게 하는 환경을 갖춰야 한다”고 진단했다.
소프트웨어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도 여전히 하드웨어 중심에 머물러 있는 제조업 분위기를 근본적으로 혁신해야 한다는 의견도 언급됐다. 최 교수는 “이미 소프트 파워 시대로 넘어갔는데 한국 대기업들이 이끄는 제조업은 여전히 하드웨어 중심에 머물러 있다”면서 “그러다 보니 첨단 산업 인재들이 국내에서 좋은 일자리를 찾기 어려운 환경”이라고 설명했다.
대기업들이 대학과 계약을 맺고 특정 분야의 맞춤형 인력을 양성하는 ‘계약학과’를 운영하고 있으나 이 역시 지속 가능성 측면에서 한계가 있다는 지적이다. 안 전무는 “계약학과는 좋은 인재를 채용하기엔 좋은 방법이지만, 의무 재직 기간이 끝나면 떠나는 경우가 많다”며 “결국에는 근본적인 처우 개선이 없으면 우수 인재는 떠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기업들이 이공계 인재들에 대한 처우를 개선하는 것은 단순히 인건비 상승이 아닌 ‘투자’ 개념으로 봐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 교수는 “인재를 뽑기 위해 비용을 쓰는 건 일종의 투자”라면서 “좋은 인재를 뽑고, 그 인재가 다시 실적을 내도록 하는 선순환 구조를 만들어야 한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