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고는 어렵고, 증거는 없어…
노인 보호 체계·제도 마련해야"
#서울에 거주하는 70대 A 씨는 주택연금에 가입해 노후 소득을 보장받고 싶었지만 포기했다. 온갖 이유를 갖다 붙이며 번번이 반대하는 자녀들이 성화를 이기지 못했기 때문이다. A 씨는 몇 년째 같은 문제로 갈등이 커지면서 자녀들과의 사이가 멀어질까 두려웠다고 했다.
'1000만 노인'(65세 이상) 시대가 열리면서 이들을 대상으로 한 경제적 학대 문제가 커지고 있다. 가해자는 자녀, 간병인 등 피해자와 가장 가까운 사람들이 대부분이어서 신고나 적발이 쉽지 않다. 사회안전망을 촘촘하게 구축해 대표적인 금융취약계층인 고령자들을 보호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27일 금융권에 따르면 우리나라가 지난해 말 초고령사회(65세 인구 20% 이상)에 진입하고 치매 환자가 증가하면서 금융 착취가 사회적 문제로 떠오르고 있다.
보건복지부의 '노인 학대 현황보고서'에 따르면 2023년 노인 학대 건수는 1만638건으로 나타났다. 이 중 경제적 학대는 352건(3.3%)으로 집계됐다. 신체적·정서적 학대뿐만 아니라 재산을 노린 금전적 학대가 새로운 문제로 떠오르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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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적 학대 피해자는 여성(242명)이 남성(110명)보다 두 배 이상 많았다. 학대는 주로 가정(305건, 86.6%)에서 발생했다. 경제적 학대 가해자 유형은 △아들(165명, 45.1%) △배우자(46명, 12.6%) △기관(46명, 12.6%) △딸(45명, 12.3%) 순으로 많았다.
특히 치매 환자가 늘어나고 있다는 점에서 우려를 낳는다. 국민건강보험의 건강in에 따르면 국내 치매 환자는 약 100만 명으로 노인 10명 중 1명꼴이다. 2050년에는 300만 명에 달할 것이라는 관측도 있다.
치매 환자의 경우 의사 표현이 어렵고 기억이 또렷하지 않아 피해 사실조차 인지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이를 악용해 자녀나 간병인이 통장에서 현금을 무단 인출하거나, 명의를 도용해 여러 계약을 체결하는 사례도 발생하고 있다. 재산 편취는 물론, 각종 급여를 대신 수령하거나 집을 팔아버리는 극단적인 사례도 적지 않다.
자녀나 친인척에 의한 경제적 착취도 심각하다. 노인의 명의를 빌려 부동산이나 금융 상품을 운용한 뒤 되돌려주지 않거나 부모의 연금을 생활비로 전용해 기본 생계조차 보장하지 않는 경우 등이다.
간병인을 통한 학대 문제도 있다. 간병인 시장이 대부분 민간에 맡겨져 있어 관리 사각지대에 놓여 있기 때문이다.
경제적 학대 피해를 입은 노인 상당수는 피해 사실을 인지하지 못하거나 알더라도 신고를 꺼린다. 특히 가해자가 가족인 경우 피해 노인은 계속 가해자와 함께 살아야 하며 법적 분쟁이 이어지면 정신적 부담도 크다. 인지기능이 저하된 경우 일관된 진술조차 어려워 실질적인 법적 보호를 받기 힘든 상황에 놓이게 된다.
전문가들은 노인의 재산 보호와 인권 보장을 위한 제도 정비가 급선무라고 지적했다. 이성복 자본시장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고령 금융소비자를 금융 착취나 금융사기로부터 보호할 수 있는 체계를 마련할 필요가 있다"며 "금융 착취나 금융사기로 인한 고령 금융소비자의 피해 실태와 원인을 조사하고 분석할 수 있는 제도적 기반을 구축하는 것이 필수적"이라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