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직연금 실물이전으로 경쟁하던 증권사 ‘우려’
계약형 vs 기금형 논의 앞서 ‘근본적 해결책’ 요구
기금형 논의 중 ‘정부 vs 퇴직연금 사업자’ 갈등 불가피
기금형 퇴직연금 도입 논의가 본격화한 가운데 정부와 퇴직연금 사업자(증권사) 간 이해관계가 엇갈려 갈등이 불가피할 전망이다. 정부는 기금형 퇴직연금 도입이 필요하다고 주장하지만, 증권가는 기금형 도입을 논하기 전에 퇴직연금 시장에 대한 근본적인 개선이 필요하다는 입장이다.
27일 금융감독원 통합연금포털에 따르면 올해 1분기 국내 증권사 14곳의 퇴직연금 적립금은 총 107조6188억 원으로 집계됐다. 지난해 4분기 말(103조9257억 원)보다 3.55% 늘어난 수준이다. 전체 퇴직연금 적립금은 지난해 말 430조 원을 넘었다. 지난해 10월 말부터 퇴직연금 실물이전 제도가 도입되면서 증권사 간 경쟁이 치열해진 영향이다. 이 제도 시행으로 투자자들은 퇴직연금 계좌를 해지하지 않고 다른 금융사로 옮길 수 있게 됐다. 이에 비교적 수익률이 높은 증권사로 자금 이동(머니무브)이 일어나자, 증권가에선 고객 유치전이 크게 일었다.
다만 증권사들은 연초부터 정부를 중심으로 기금형 퇴직연금 도입이 급물살을 탔다는 점을 우려하고 있다. 증권업권의 새로운 먹거리로 떠올랐던 퇴직연금 사업이 기금형 도입으로 혼란을 겪을 수 있다는 점 때문이다. 현재 국내 퇴직연금 시장은 개인이 직접 금융상품을 선택해 금융기관에 운용·지시하는 계약형이다. 퇴직연금 전문가가 아닌 개인이 적극적으로 굴리기 어렵다 보니 수익률이 낮다는 지적이 있었다. 실제 2019~2023년 퇴직연금의 연평균 수익률은 2.35%로, 같은 기간 국민연금 수익률(6.86%)을 크게 밑돈다.
이에 1월 정부의 ‘2025년도 경제정책방향’에 퇴직연금 수익률 제고를 목적으로 기금형 제도 도입을 검토한다는 내용이 등장했다. 지난달 21일에는 고용노동부가 ‘기금형 퇴직연금 제도 도입 추진 자문단’을 출범시키며 관련 논의를 본격화했다. 기금형을 도입하면 전문성을 갖춘 기관(수탁법인)이 체계적으로 적립금을 굴려 수익률을 높일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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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권가는 국내 퇴직연금 시장은 계약형과 기금형 차원의 문제가 아니라는 입장이다. 퇴직연금 수령자의 92%가 퇴직연금을 일시금으로 수급하고, 중도인출 비율이 높다는 점 등을 해결하지 못하면 기금형을 도입해도 수익률 제고에 대한 실효성이 미미할 것으로 본다. 한 증권업계 관계자는 “퇴직연금에 대한 일시금 수령, 중도인출 비율이 높은 이유는 퇴직연금 수익률이 낮아서가 아닌 주택 구매나 전세금 등 주거비에 나가는 돈이 너무 많다는 문제 때문”이라며 “디폴트옵션을 활성화하는 등 지금 있는 제도를 보완하면서도 ‘나무가 아닌 숲’을 보는 식으로 사회 전반에 얽힌 문제들을 풀어나가야 한다”고 했다.
기금형을 도입하면 적립금을 굴릴 수탁법인에 대한 위험도 고려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금융사로 분류되지 않는 수탁법인 특성상, 이를 관리·감독할 주체가 명확지 않다. 운용에 문제가 생기거나 수탁법인이 부실화할 경우, 계약자와 자금을 보호할 장치를 마련하는 데 시간이 걸릴 수 있다. 이외 수탁법인에 지급할 수수료 등에 대한 논의 등 준비해야 할 사항이 많다.
한편, 정부에서도 퇴직연금 기금화에 대해 신중한 검토가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있다. 지난해 11월 국회 환경노동위원회의 ‘근로자퇴직급여 보장법 일부개정법률안 검토보고’의 검토 의견 부분에는 “공공기관이 운용하는 기금형 퇴직연금제도는 투자 주체(공공기관)와 책임의 귀속주체(근로자)가 상이하고, 기금운용의 손실이 발생한 경우 근로자의 노후소득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점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