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광구 우리은행장이 새해 첫 영업일인 2일, 임직원 70여명과 함께 영친왕 묘소 홍유릉을 참배했다. 영친왕은 우리은행의 전신 대한천일은행 은행장을 지냈다.
이 행장은 "정부의 금융개혁에 발맞춰 관습에 갇힌 태도를 강하게 혁신할 것"이라며 "경제에 힘이 되는 강한은행으로 발돋움하여 고객에게 신뢰와 사랑을 얻고, 민영화도 성공적으로 이루자...
이후 고종의 일곱째 아들 영친왕이 기거했으며 고종은 1919년 1월 승하할 때까지 집무실과 알현실로만 사용했다.
석조전 복원에 대해선 여전히 안팎으로 의견이 갈리고 있다. 영국인 고문의 제안으로 일본인 공사감독과 일본 시공사가 축조한 건물이 어느 정도 역사적 가치를 지니느냐는 것이다. 하지만 '석조전 복원'은 대한제국의 위상을 높여 자주 근대화를...
덕수궁 석조전은 영친왕(1897~1970년)의 귀국 시 숙소로 사용되다 일제강점기에 이왕가미술관으로 변형됐고 해방 이후 미소공동위원회 회의 장소로 사용된 역사적인 장소다.
지난 2008년 원형 복원이 결정된 석조전은 2009년부터 올해까지 약 141억원의 사업비가 투입돼 복원됐다.
새롭게 복원된 덕수궁 석조전은 '대한제국역사관'으로 개관, 대한제국 황실의...
유네스코가 정한 세계문화유산이기도 한 홍유릉은 지금으로 부터 115년 전인 1899년 민족자본과 황실자본으로 우리은행의 전신인 대한천일은행을 탄생시킨 고종황제와 대한천일은행 2대 은행장을 지낸 영친왕의 묘소가 위치한 곳이다. 우리은행은 매년 홍유릉을 참배함으로써 우리은행의 뿌리와 역사적 사명을 되새기고 있다.
한편 이 회장은 우리금융그룹 신년사를...
효성굿윌스토어 1호점에는 양학선 체조 선수·손연재 리듬체조 선수 등의 스포츠 스타들이 소장품을 기증했고, 효성 임직원들도 박정희 전 대통령의 휘호액자와 조선말기 영친왕의 황태자비 이방자 여사의 휘호액자 등 애장품을 활발히 기부하고 있다.
이날 장형옥 효성 인사총괄 부사장은 “효성이 단순히 사회적기업을 지원만 하던 단계에서 벗어나 직접...
고종의 아들이자 조선의 마지막 황태자인 영친왕 이은(1897∼1970). 이토 히로부미에 의해 11세 때 강제로 일본에 끌려간 영친왕은 타국에서 힘든 삶을 살았다. 그와 함께 고통받은 인물이 또 있었다. 16세 때 한·일 정략결혼의 희생자가 된 이마사코(1901∼1989)라는 여인.
그녀는 일본 황족 나시모토미야의 딸로 일본 황태자비로 거론 됐지만 '한·일 융화'라는 미명...
이순우 우리은행장은 강당에서 실시하는 시무식을 대신해 남양주에 위치한 홍유릉을 찾아 고종황제와 영친왕 묘소를 참배, 서민금융지원 등 금융소외계층을 위한 지속적인 참금융 실천을 약속했다.
이 행장은 이 자리에서 “현재의 우리은행을 있게 한 역사적 사명을 다시한번 되새겨 참금융을 실천하는 은행의 본(本)을 다하겠다”며 “금융소비자 권익 보호를 위한...
우리은행은 2일 새해 첫 업무로 이순우 은행장을 비롯한 임직원 70여 명이 남양주에 위치한 홍유릉을 찾아 고종황제와 영친왕 묘소를 참배하고 서민금융 실천다짐 행사를 가졌다고 밝혔다.
홍유릉은 114년 전인 1899년 민족자본과 황실자본으로 우리은행의 전신인 대한천일은행을 탄생시킨 고종황제와 대한천일은행 2대 은행장을 지낸 영친왕의 묘소가 위치한 곳으로...
고종황제의 아들, 영친왕이 사용했다는 안장과 발걸이 또한 마사박물관의 대표적인 소장품이다.
일상생활에서 쉽게 접할 수 있었던 말 문화 관련 유물도 있다. 기마인물형 토기는 술 따위를 따를 수 있는 의례용 토기다. 제사 의식을 위해 제작한 토제마도 있다. 고려 시대에 크게 유행했던 격구 도구가 특히 시선을 잡는다. 격구는 지금으로 치면, 골프나 하키와 같이...
마지막 황태자로 우리은행(당시 대한천일은행) 제2대 은행장인 영친왕이 주인공입니다.
당시 ‘조선사람 이외에는 대한천일은행의 주식을 사고 팔 수 없다’고 정관에 명시할 정도로 민족자본은행의 성격이 짙었습니다. 전국 각지에서 민족자본만을 이용한 은행설립이 많이 시도됐지만 모두 좌절됐고 당시엔 우리은행의 전신인 대한천일은행만이 유일하게...
1902년 제2대 은행장으로 대한제국 마지막 황태자인 영친왕이 취임했다.
1905년 일본에 의해 조선 상권이 피폐화됐던 백동화사태 때에도 ‘대한천일은행’은 일제에 저항하며 휴업을 단행하기도 했다. 또한 1907년부터 일본에 진 나랏빚을 갚자는 국채보상운동에 적극 참여해 모금액을 관리하기도 했고, 독립자금을 관리해 조선의 독립을 위한 민족은행으로서의 역할을...
우리은행은 4일 경기도 남양주시 금곡동 소재 홍유릉에서 이순우 은행장 등 임직원 150여 명이 민족금융의 기틀을 마련한 고종황제와 영친왕을 참배하고 홍유릉 일원에 소나무를 식재하는 등 ‘홍유릉 참배 및 식목행사’를 가졌다고 밝혔다.
이날 행사는 1899년 민족자본과 황실자금을 근간으로 민족은행인 우리은행의 설립을 적극적으로 지원한 고종황제와...
명휘원은 우리은행의 전신 대한천일은행의 2대 은행장인 영친왕의 비, 이방자 여사가 1967년 경기도 안산에 설립한 지적장애인 보호시설로 현재 100여명의 원생이 생활하고 있다.
우리은행 임직원과 명사클럽 회장단 30명은‘사랑의 지킴이 협약식’후 명휘원 원생들과 함께 사랑의 쿠키를 만들었으며, 지난 9월 우리은행 명예지점장 200여명이 제주생태 올레길...
대표적인 기사가 1963년 11월22일 고종황제의 막내아들인 영친왕 이은 공이 일본에서 57년간의 볼모 생활을 끝내고 중환자가 돼 김포공항에 도착했는데 이때 취재경쟁이 치열했다고 한다. 하지만 경찰이 기자단의 접근을 막은 데다 이은 공이 중환자여서 비행기에 내리자마자 바로 앰뷸런스로 병원에 직행해 기자들이 취재를 하지 못했다.
그런데 다음날자 조간신문 중...
한편, 우리은행은 지난 1월 4일 창립 111주년 기념식장에서 이종휘 은행장과 이건무 문화재청장이 참여한 가운데 ‘한 문화재 한 지킴이 협약’을 맺고, 홍릉(洪陵)과 대한천일은행 제2대 은행장을 지낸 영친왕(英親王)의 묘소인 영원(英園)을 가꾸로 보존하기 위한 다양한 활동을 전개키로 했다.
일본의 한 향토사학자가 어린 덕혜옹주가 도쿄에 체류하던 시절 다녔던 가쿠슈인(황족과 귀족의 아이들이 다니던 학교)의 동급생의 증언을 채록한 원고가 공개된 것.
이 원고에는 '덕혜옹주가 가쿠슈인 시절 끊임없이 독살 공포에 시달렸고, 덕혜옹주가 아버지인 고종 황제와 조카인 영친왕의 1남이 독살됐다고 말했다'고 기록돼 있다.
총 3부에 걸쳐 진행된 이날 창립 행사에서 우리은행은 창립 당시 내탕금(황실자금)을 출연한 고종황제의 묘소인 홍릉(洪陵)과 2대 은행장을 지낸 영친왕의 묘소인 영원(英園)을 보존하고 후원하기 위해 문화재청과 '1문화재 1지킴이'협약식을 갖았다.
또 주변의 작은 변화를 통해 기업가치를 업그레이드하자는 '우리 플러스 1' 프로젝트 출발을 알리고 서비스와...
이종휘 우리은행장 등 우리은행 경영진 40여명이 경기도 남양주시에 있는 홍유릉을 방문해 고종황제와 영친왕을 참배했다.
이번 참배는 1899년 민족자본으로 출범한 최초의 민족정통은행으로서 자부심을 갖고 은행 설립 시 설립자금 지원과 2대은행장으로서 도움을 준 고종황제와 영친왕의 뜻을 기리기 위해서다.
1899년 3월, 일제의 경제침략에 맞서 민족자본의...
또한 1902~1906년까지 6세의 나이로 대한천일은행 2번째 은행장을 역임한 영친왕의 기록이 담긴 최초의 주주명부 '대한천일은행 좌목'과 1902년 은행장 취임과 국립고궁박물관 소장 대한제국 황실에서 사용하던 '이화문식기' 7점도 중요 전시유물이다.
더불어 우리나라 최초 은행지점인 대한천일은행 인천지점이, 일본상인에 대항해 민족상인들이 조직한...
향후 '한국금융 110년 민족은행 특별전'을 통해 우리은행 금융문화유산을 널리 알릴 예정이다.
한편 최초의 민족은행인 대한천일은행은 서양제국주의 침탈과 외국계 은행의 진출로 자주금융과 전통상업의 위협을 받고 있던 구한말 1899년에 고종황제의 내탕금(황실자금)을 기초로 설립되었으며, 영친왕(英親王)이 제2대 은행장으로 취임한 역사적 기록을 간직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