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소혜왕후는 여성들을 교육하기 위한 교과서로 ‘내훈’을 직접 지었다. 1475년 왕대비로 책봉된 해에 유교 윤리에 입각해 펴낸 이 책은 조선 최초로 여성에 의한 여성을 위한 저서로 평가받고 있다.
소혜왕후는 ‘내훈’에서 여성들이 길쌈만 하지 말고 수신할 줄 아는 인간이 되어야 하며 그러기 위해서는 글을 배워야 한다고 주장했다. 소혜왕후는 “예기(禮記)...
천추태후의 아이는 왕이 되지 못했고, 그녀의 아이는 왕이 되었기 때문이다. 국가의 공식 사서가 어찌 승리자의 기록이 아니겠는가!
현종은 왕위에 오른 뒤 그녀를 효숙(孝肅)왕태후라고 추존하고, 무덤을 원릉(元陵)이라고 하였다.
공동기획: 이투데이, (사)역사 여성 미래, 여성사박물관건립추진협의회
새누리당 여성 의원들이 표 의원에 대한 국회 윤리위 제소를 공언한 가운데, 민주당도 표 의원을 당 윤리심판원에 회부키로 했다. 표 의원은 ‘표현의 자유’를 앞세우면서도 “책임을 져야 한다면 지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표 의원 주최로 지난 20일부터 열린 ‘곧, 바이전’이란 전시회에서 가장 논란을 빚은 건 ‘더러운 잠’이란 제목의 작품이다. 프랑스 화가...
그는 1924년 신흥청년동맹을 비롯하여, 5월에는 조선여성동우회 결성에 주도적으로 참여하였으며, 1925년 1월에는 주세죽·김조이 등과 함께 경성여자청년동맹을 결성하는 등 여성운동계에서 맹활약하였다. 또한 1925년 8월에는 ‘신여성’ 잡지에 특집 ‘단발호’를 실어 여성 단발을 주창하는가 하면, 수가이(秀嘉伊·sky)라는 필명으로 1928년 1월 동아일보에...
뜻을 같이한 첫 남편 신철과 이혼한 후 다른 운동가와도 재혼하였으나 신철이 아플 때는 지극 정성으로 돌보는 그런 여성이었다. 운동가들의 옥바라지도 도맡아 하여 큰누님처럼, 어머니처럼 보살핌으로써 ‘운동계의 대모’라 불렸다. 옥중에서까지 출산을 도와준 따뜻하면서도 치열한 그에게는 3·1운동과 대동단원으로 투옥된 어머니의 영향이 컸던 것 같다. 이...
제3지대장 남편을 돕는 일이기도 하였지만, 자신들의 주체적인 활동으로 여성 참여를 위한 선전, 모병활동 등을 한 것이다. ‘한국 여성 동지들에게 일언을 드림’이라는 글에서 “우리 여자가 없으면 세계를 구성할 수 없을 것이며, 또한 우리 민족을 구성하지 못할 것이다”라고 역설하였다.
광복 후에는 상하이에서 총사령부 주호판사처(駐?辦事處) 처장으로...
1929년 3월 학교를 졸업한 뒤에는 근우회 제2회 전국대회에서 중앙집행위원으로 선임되어 여성들의 민족운동 활성화를 위해 적극적으로 활동했다. 서울 시내 각 여학교 학생들의 시위를 지도하였으며, 1930년 1월엔 부산방직 파업사건을 주도하다가 동래에서 체포됐다. 당시 그는 보안법 및 출판법 위반으로 경성지방법원 검사국에 송치되었으나 병보석으로...
1930년 당시 주로 기혼 여성들이 일하던 고무공장, 고무신 공장의 노동조건은 열악하기 짝이 없었다. 저임금, 장시간 노동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다시피 하여 공장에 나온 여공들의 작업은 말 그대로 피땀을 흘려야 하였다. 갓난아기에게 젖을 물리며 작업을 하는 여성도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고무공장 여공들은 자연스레 파업을 빈번하게 일으킬...
그래서 공주 대신 청으로 보낼 여성들을 1차적으로 선발했고, 이들 중 청 사신들이 이개윤의 딸을 최종 선택했다. 효종은 이개윤의 딸을 양녀로 삼아 ‘공주’로 봉작하고 ‘의순공주’라는 이름을 붙여주었다. 당시 나이 16세였다.
1650년 4월에 조선 땅을 떠나 청에 도착한 의순공주는 그해 5월 도르곤과 혼인했다. 공녀로 끌려간 일도 불행이었으나 다시 불행이...
이에 비해 ‘음식디미방’은 직접 음식을 만드는 여성이 한글로 지었다는 점에서 획기적인 ‘사건’이라 할 수 있다. 한문을 구사할 줄 알던 장씨가 여성(딸)들을 위해 선택한 이 같은 시도로 우리는 귀중한 문화유산을 갖게 되었다.
공동기획: 이투데이, (사)역사 여성 미래, 여성사박물관건립추진협의회
한 인물의 삶은 그 사회를 읽어내는 척도가 되기도 한다. 어우동은 한 시대가 추구한 이데올로기 때문에 억울한 죽음을 맞이했다. 유배형으로 끝날 수도 있었던 형벌이 죽음까지 간 데에는 성종의 의지가 컸다. 이런 측면에서 어우동에 대한 재조명은 역사적 맥락 안에서 그녀의 생애와 죽음에 대해 관심을 갖는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
공동기획: 이투데이, (사)역사 여성...
그러나 고려시대의 정절 의식은 후대와 달리 남편의 생전에 한한다. 또 가계계승 의식도 어머니의 성을 취할 만큼 양계적(兩系的)이었다. 그녀는 유교적 관점에서는 ‘음녀’ ‘악녀’로 낙인 찍혔지만, 고려시대 최고의 여성 정치가였다고 하겠다.
공동기획: 이투데이, (사)역사 여성 미래, 여성사박물관건립추진협의회
그녀가 사망하자 대목왕후라는 시호를 내리고 광종의 사당에 합사하였다. 1002년에 안정(安靜), 1014년에 선명(宣明), 1027년에 의정(懿正) 및 신경(信敬), 1056년에 공평(恭平), 1253년에는 정예(靜睿)라는 시호를 각각 추가하였다.
공동기획: 이투데이, (사)역사 여성 미래, 여성사박물관건립추진협의회
안정숙의공주는 태조의 딸로 신라의 왕과 혼인하여 양국의 우의를 다졌다는 점에서 후삼국 통일에 기여했다고 볼 수 있다. 또한 5남2녀의 자식들이 잘 자라 제몫을 하게 했다는 점에서 당시의 사회가 요구하던 아내와 어머니의 역할을 다했다고도 평가할 수 있다.
공동기획: 이투데이, (사)역사 여성 미래, 여성사박물관건립추진협의회
소광주원부인 역시 죽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녀는 아버지와 뜻을 같이했을까? 아들을 옥좌에 앉히고 싶었을까? 역사는 말이 없다. 그녀는 아버지의 헛된 욕망에 희생된 비극의 여인 혹은 잘못된 것을 탐한 욕망의 여인으로 간주될 것이다.
공동기획: 이투데이, (사)역사 여성 미래, 여성사박물관건립추진협의회
신명순성왕태후(神明順成王太后) 유씨(생몰년 미상)는 고려 태조의 제3비로, 충주 출신 호족인 증태사내사령(贈太師內史令) 유긍달(劉兢達)의 딸이다. 신혜왕후, 장화왕후에 이어 고려 건국 전 태조와 혼인하였다.
태조는 전국의 내로라하는 호족 딸들과의 혼인을 통해 후삼국 통일을 꿈꾸었다. 왕후와의 혼인 역시 그녀 집안의 위상과 무관하지 않다. 충주는 한강 상류에...
어린 왕의 즉위가 계기가 되기도 했지만, 여성의 정치 활동에 대해 부정적인 인식이 확산된 상황에서 만월태후의 섭정에 대한 반발도 적지 않았던 것이다.
진골 귀족들의 반란이 끊임없이 이어지는 가운데 만월태후는 771년(혜공왕 7년)에 성덕대왕 신종을 만들게 하였다. 이 종은 에밀레종이라는 별칭으로도 유명하다. 종을 만들 때 가난한 집 어린아이를 넣어...
알영(閼英)은 신화상의 인물로, 아이영(娥伊英) 아영(娥英) 아리영(娥利英)이라고도 한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13세에 신라의 건국시조인 혁거세와 혼인을 하였다. 제2대 남해왕의 어머니이다. 신라에서 시조묘 제사를 담당했던 아로가 남해왕의 누이동생이라고 하는데, 알영의 소생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신라의 건국신화에는 알영이 사량리에 있는 연못인 알영정에...
공동기획: 이투데이, (사)역사 여성 미래, 여성사박물관건립추진협의회
신제도원이 ‘일본서기’에 이름을 남기게 된 것은 백제 왕녀로서 왜로 건너갔다는 점 때문이었다. ‘일본서기’에는 응신천왕 39년에 신제도원이 7명의 여성을 거느리고 왜로 왔다고 하였다. 신제도원이 무슨 일로 왜로 갔으며, 이후 어떻게 살았는지에 대해서는 더 이상 구체적인 언급이 없다....
이러한 상황에서 중천왕이 연노부의 압력을 이기지 못하고 어쩔 수 없이 힘없는 관나부 출신을 희생시켰던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관나부인은 강력한 배경을 갖고 있었던 연나부 출신 왕후와의 권력 싸움에 밀려 투기죄의 명목으로 시체도 찾지 못하게 수장된 것이다.
공동기획: 이투데이, (사)역사 여성 미래, 여성사박물관건립추진협의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