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여의도가 자본시장의 중심지가 되기 시작한 것은 1979년 7월 2일부터다. 1956년 3월 3일 서울 명동에서 문을 연 대한증권거래소(현 한국거래소)가 1979년 여의도 신축 건물로 이전하면서 지금의 증권타운 형성의 시발점이 됐다.
거래소의 여의도 이전은 자본시장 성장과 연관이 깊다. 금융투자협회에 따르면 1978년 말 기준 상장회사는 356개, 상장자본금...
1970년대와 1980년대는 대한민국 자본시장이 도약을 거듭한 시기로 기억된다. 하지만 이 시기에 자본시장이 직진만 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급격한 성장에 따른 역효과로 가장 큰 위기를 맞기도 했다. 고(故) 백경복 전 증권업협회장(제32대, 제33대)은 이른바 ‘건설주파동’ 등으로 시장이 송두리째 흔들렸던 1977년~1983년 증권업계를 이끈 인물이었다. 증시의 원로들...
대한증권거래소(현 한국거래소) 유찬 이사장 비롯해 전(全 ) 임원 사임. 미화, 제일, 내외, 대창증권 등 4개 증권사 면허 취소.
1958년 1월 16일 증권사들이 국채를 결제하지 못한 ‘1ㆍ16 국채파동’이 낳은 파장이다. 당시는 고(故) 지덕영 전 증권업협회장이 협회를 처음 맡았을 시기이다. 당시 영향으로 태동기를 걷고 있던 한국 자본시장은 공신력을 잃었다....
황무지에서 싹을 틔운 국내 자본시장이 오늘날 큰 나무가 되기까지는 많은 손길이 필요했다. 그중에서도 빼놓을 수 없는 역할은 어린 묘목이 아플 때 치료해주는 손길이다. 1962년 이른바 ‘증권파동’이후 증권업협회(현 금융투자협회)를 이끌었던 고 지덕영 전 증권업협회장의 이야기다. 지 전 회장은 국내 증권시장이 가장 암울했던 시절 업계를 이끌며 ‘암흑기’...
해방 직후 ‘자본시장 활성화’라는 증권계 원로들의 염원은 쉽사리 이뤄지지 않았다.
1945년 8월 해방 직후 우리나라 주식 중 경성방직, 경성전기, 조선기계, 조선맥주가 상장됐다. 그러나 이 주식의 유통은 우리의 뜻대로 되지 않았다. 당시 미군정은 우리나라의 경제 사회적 상황을 고려, 증권시장의 존재 가치가 없다고 판단했다. 이들은 1946년 4월 16일 군정명령...
고(故) 송대순 대한증권업협회(현 한국금융투자협회) 초대 회장은 국내 자본시장의 선두자로 평가되고 있다. 그가 1949년 설립한 대한증권(현 교보증권)은 1956년 대한증권거래소(현 한국거래소)가 생기기 전에 만들어졌다. 이 때문에 당시 대한증권은 증권사인 동시에 거래소의 역할도 했다.
◇송 회장, 자본시장 태동 알린 ‘증권구락부’ 설립 주도= 송 전 회장은...
김창희 전 대우증권(현 미래에셋대우) 사장은 국내 ‘리서치센터’ 개념을 처음 도입해 증권업계의 획기적인 변화를 이끈 인물이다. 취임 첫해 국내 최초 민간 경제연구소인 ‘대우경제연구소’를 설립한 것도 그의 의지였다. 현재 금융투자업계를 비롯해 정치·경제·사회 곳곳에 진출해 있는 출신 인사들의 면면을 보면 그가 인재양성에 얼마나 공을 들였는지 알...
‘국내 최초의 민간 경제연구소 설립’, ‘국내 증권회사의 최초 해외사무소 개설’, ‘업계 최고 수준의 애널리스트 다수 배출’. 국내 증권역사를 말할 때 빼놓을 수 없는 ‘대우증권’(현 미래에셋대우)이라는 이름에는 국내 ‘최초’와 ‘최고’라는 수식어가 많이 붙는다. 적어도 1997년 외환위기 이전까지 대우증권은 증권업계 독보적인 1위였다.
고(故) 김창희...
타임은 또 로이 최가 샌프란시스코에서 유명 레스토랑 ‘코이’를 운영하는 대니얼 패터슨과 의기투합해 빈곤층 이웃에게 건강한 패스트푸드를 제공하는 뜻깊은 사업에 나섰다는 내용도 소개했다.
한편 타임이 해마다 개척자(23명), 거인·거목(15명), 예술가(18명), 지도자(31명), 아이콘(13명) 등 5개 분야에서 세계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하는 인물을 선정한다.
“사명감으로 기업을 감사하거나 회계의 투명성을 높였던 분들은 정말 많습니다.”
지난 18일 서울 성북구 보문로에 있는 보험연수원에서 만난 최진영 원장(58ㆍ전 금융감독원 회계 전문 심의위원)이 말을 꺼내기를 주저하면서 한 첫마디다. 그는 “회계 분야에서 훌륭한 분들이 정말 많은데…”라며 망설였다. 최 원장은 회계 1세대라고 부를 수 있는 원로는 아니었다....
이어룡 대신금융그룹 회장은 금융투자업계 유일한 여성 경영인으로, 대신증권 창업을 이끈 故 양재봉 창업자의 며느리다. 이 회장은 여성 특유의 섬세함을 무기로 부드러운 카리스마로 대신금융그룹을 이끌고 있다. 양 창업자가 대신증권의 기반을 마련했다면 이 회장은 대신증권의 전성기를 이끌고 있다는 평가다.
이 회장이 가장 강조하는 것은 고객수익경영이다....
고(故)양재봉 대신증권 창업자는 맨손으로 대신증권을 최고의 증권사로 키워낸 증권가의 전설적 인물로 꼽힌다.
1925년 전라남도 나주에서 태어난 그는 ‘금융보국’의 신념 아래 50여 년 동안 오로지 금융 외길만을 걸으며 한국자본시장의 발전을 이끌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실제 그는 대신증권을 비롯해 대신생명보험, 대신경제연구소, 대신개발금융...
1995년 백원구 증권감독원장 당시 구체화 되지 못한 통합 금감원 설립은 후임 박청부 원장 시기에 이뤄졌다. 통합 과정에서 증권감독원은 물론 각 감독기관의 우려와 반발이 끊이지 않았다.
애초 기관 통합 논의는 1995년 한국은행 독립 논쟁 과정에서 처음 대두했지만 한차례 무산된 후 1997년 2월 다시 추진됐다. 정부는 재정경제원과 은행·증권·보험감독원 등에 분산된...
고(故) 백원구 전 증권감독원장은 이 기관의 위상 정립과 함께, 조직의 수장으로서는 처음으로 수뢰 혐의로 구속된 적이 있는 엇갈린 평가를 받는 인물이다.
그는 임명 과정부터 순탄치 않았다. 백 전 원장은 1994년 5월 재무부 차관에서 물러나자마자 증감원장에 내정됐다. 당시 그의 전임이었던 박종석 전 원장은 “홍재형 재무부 장관으로부터 사전에 양해를 받지...
국내 최초로 대규모 콘도미니엄 사업을 도입해 시작했던 김 회장은 레저산업계의 거목으로 알려졌다. 그가 세운 명성콘도는 1986년 한화그룹에 넘어가 지금의 한화리조트로 재탄생했다.
김 회장은 산은캐피탈 인수에 뛰어들면서 과거의 명성을 되찾으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특히 김 회장이 최근 태백 탄광지대를 개발하는 프로젝트를 발표한 점을 미뤄볼 때...
극서정시라는 개념을 처음 제시했고, 여백과 순수한 서정성을 되찾겠다고 주장하는 한국 시단의 거목이다.
최 신임회장은 “유치환, 김준수, 조지훈, 박목월 등 한국 대표 시인들이 일궈온 시인협회의 회장에 취임하는 것에 대해 무거운 책임감을 느낀다”며 “문화융성시대를 선도하는 시 쓰기, 시 나누기 행사를 통해 풍요로운 삶의 감정을 모두가 향유할 수...
한일 재계의 거목으로, 국내 재계 순위 5위의 롯데그룹을 일군 신격호 롯데그룹 총괄회장이 경영에서 완전히 손을 뗀다.
슬하의 동주·동빈 형제가 경영권 분쟁을 일으키며 부침을 겪는 동안 롯데그룹의 무게 추는 ‘한일 원 리더’를 여는 방향으로 자리 잡았다. 25일 롯데제과 등기이사에서 사임되는 등 ‘거인’ 신격호는 롯데와 작별하고 있다.
‘청년’ 신...
박종석 전 증권감독원장이 증감위 업무를 시작한 시기는 88올림픽으로 부풀었던 증시 바람이 급격히 빠져나가던 1990년 4월이었다. 박 전 원장은 부임 직후 당시 정영의 재무부장관, 이용만 은행감독원장, 박상은 보험감독원장 등과 만나 증시 회생대책을 긴급 협의해야 했다.
이를 통해 그해 5월 1차 증시안정기금이 조성됐다. 당시 조성된 4조8000억원의 기금 중...
박종석 전 증권감독원장은 증권업보다는 은행업권에 잔뼈가 굵은 인사였다. 자유를 빙자한 방임이 넘쳐나던 증권시장에 은행업권과 같이 체계적인 규율을 도입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러나 박 전 원장의 출발에는 기대보단 아쉬움이 먼저 자리했다. 정영의 4대 원장이 취임 한 달여 만에 재무부장관으로 발탁되면서 급하게 그 공백을 메우게 됐기 때문이다. 정 전...
“시장은 시장에서 관리하겠다.”
재무부(현 기획재정부)로부터의 감독 실권 확보라는 이 같은 아젠다는 1977년 증권감독원 설립 초기부터 고민해온 숙제이며 증감원 독립의 역사로 자리 잡고 있다. 1999년 금융감독원 설립 이후에도 수장은 재무부 출신이 독점했지만 당시 증감원 설립 초반에는 ‘재무부 보조기관’으로 불릴 만큼 자체 권한이 유명무실해 감독 실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