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공지능(AI)의 급격한 확산 이후 화이트칼라 직무의 위기설이 대두될 때마다 법조계는 대표적인 대체 직군으로 거론됐다. 방대한 판례 검토와 법률 문서 작성 작업은 데이터 처리에 특화된 생성형 AI의 주요 기능과 맞닿아 있기 때문이다.
글로벌 AI 업계 일각에서는 법률 업무의 완전 자동화나 2035년 전통적 변호사의 소멸 전망까지 제기됐다. 그러나 현실의 지표는 다른 방향을 가리키고 있다.
17일(현지시간) 미국 워싱턴포스트(WP)에 따르면 생성형 AI 확산에도 미국 내 변호사 수는 오히려 증가세를 이어가고 있다. 2020년 이후 로스쿨 지원자는 최근 두 개 입시 시즌 동안 약 40% 급증했으며 지난해 법학전문대학원 졸업생의 전체 취업률과 변호사 자격이 필요한 직무 취업률 모두 역대 최고치를 기록했다.

기술의 발전이 특정 직업의 고용을 감소시킬 것이라는 예측은 과거에도 빈번히 빗나갔다. 대표적인 사례가 2010년대에 도입된 '전자증거개시(e-discovery)' 기술이다. 수백만 건의 소송 문서를 자동으로 분류하는 소프트웨어가 처음 등장했을 때 주니어 변호사의 대량 실직이 예상되었으나 결과는 반대였다.
문서 분석 비용이 낮아지자 소송 과정에서 검토해야 할 디지털 증거의 양 자체가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했고, 낮아진 법률 서비스 비용 문턱으로 인해 과거에는 소송을 포기했던 잠재적 수요자들이 시장으로 유입됐다. 자원의 이용 효율성이 높아지면 오히려 해당 자원의 소비량이 늘어난다는 '제번스의 역설(Jevons Paradox)'이 법률 시장에서 나타난 것이다. AI가 법률 초안 작성과 리서치 비용을 낮추면서 과거 비용 부담으로 인해 자문을 구하지 못했던 영역에서 새로운 법률 수요가 발생하고 있다.

법률 업무는 사실관계를 바탕으로 규칙을 적용해 산출물을 내는 선형적 구조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법률 서비스의 핵심은 사회적 모호성을 해석하고 조정하는 데 있기 때문이다. 생성형 AI가 계약서 초안과 판례 요약본을 도출할 수는 있으나 복잡한 대립 상황에서 의뢰인에게 최선이 되는 판단까지 내리기는 어렵다.
무엇보다 AI는 자신이 도출한 결과물에 대해 법적 책임을 지지 않는다. 법률 업무에서 고부가가치를 창출하는 단계는 텍스트 생산 자체가 아니라, 해당 텍스트가 초래할 리스크를 평가하고 이에 대한 책임을 담보하는 영역이다. 이에 따라 생성형 AI는 변호사의 대체재가 아닌 업무 보조 도구로 활용되고 있으며, 정형화된 하위 업무가 자동화될수록 인간 변호사는 고도의 이해관계 조정과 리서치 검증 등 상위 가치 사슬로 이동하는 추세다.

신기술의 등장에 따른 새로운 규제와 분쟁의 발생은 변호사 수요를 견인하는 외생적 요인이다. AI 기술의 확산은 저작권 침해, 딥페이크를 활용한 명예훼손, 데이터 수집 과정에서의 개인정보 유출, 알고리즘 편향성으로 인한 차별 문제 등 과거에 없던 새로운 형태의 법적 갈등을 야기하고 있다.
한국 시장의 경우 로스쿨 도입 이후 공급 과잉과 송무 시장 포화 논란이 지속되어 왔으나, 생성형 AI 관련 규제 법안의 시행이 새로운 수요를 창출하고 있다. 특히 올해 1월 22일부로 시행된 국내 'AI 기본법(인공지능 발전과 신뢰 기반 조성 등에 관한 기본법)'에 대응하기 위해 기업들의 컴플라이언스(법규 준수) 자문 요청이 본격화됐다. AI 생성물의 워터마크 표시 의무화, 고영향 AI 관리 기준 마련 등 정립된 법적 의무를 준수하고 위반에 따른 과징금 리스크를 회피하려는 기업들이 로펌을 찾으면서 새로운 시장이 형성되고 있다.
결과적으로 문과 직업 시장의 지형은 정보 검색 및 정형화된 초안 작성 중심에서 복잡한 맥락의 해석과 책임 소재 설계 중심으로 재편되는 흐름을 보이고 있다. 리서치 중심의 단순 업무는 AI로 대체되더라도, 사회적 제도의 고도화와 신종 분쟁의 증가로 인해 법적 판단과 책임을 제공하는 변호사의 총수요는 유지되거나 오히려 증가하는 방향으로 시장이 움직이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