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일 아침 '긴 대기줄'이 시내 곳곳에서 포착됐습니다. 전날(28일)과 비슷한 풍경입니다.
이들은 SK텔레콤(SKT) 대리점 앞에 서서 문이 열리기만 기다리고 있었는데요. 유심(USIM)을 구하기 위한 줄이었죠.
최근 SKT의 유심 정보 서버 등 핵심 인프라가 해킹당한 가운데, SKT가 전날부터 전국 대리점을 통해 유심 무료 교체 서비스를 시행한 데 따른 건데요. 매장 오픈으로부터 얼마 지나지도 않아 준비된 유심 물량이 동났고요. 화가 난 시민들이 '재고 현황을 제대로 공지하라'는 취지로 항의하는 모습도 곳곳에서 포착됐습니다. 그야말로 '유심 대란'이었죠.
줄을 선 시민 중 적지 않은 이들은 60대 이상 중장년층과 노년층이었습니다. 디지털 기기에 익숙한 청년층이야 'SK텔레콤 유심 무료 교체 신청' 공식 웹사이트에 접속해 서비스를 예약하거나 '유심 보호 서비스'에 가입하는 등 SKT가 안내한 우선 대책에 따르고 있는데요. PC는 물론 스마트폰 사용에도 어려움을 겪는 디지털 소외 계층의 경우 거리로 나설 수밖에 없는 실정입니다.
관련 뉴스
SKT는 18일 해커에 의한 악성 코드로 유심 정보 유출 피해가 발생, 전날부터 전국 T월드 매장 2600여 곳에서 유심 무료 교체 서비스를 진행했습니다. 온라인으로도 유심 교체 예약 신청을 받고 있는데요. T월드 사이트에 예약자가 몰리면서 불편을 겪어야 했죠.
코미디언 박성광이 전날 게재한 사진에는 대기 인원 47만7352명, 예상 대기 시간 132시간 35분 52초가 적혀 놀라움을 자아냈습니다. 박성광은 이날 유심 교체를 위해 T월드 매장을 직접 방문한 사진도 올려 눈길을 끌었는데요. 매장 앞은 이미 고객들로 문전성시를 이루고 있었죠. 그는 "유심칩 바꾸려고 왔는데 줄이 어마어마하다"면서 "20년 충성 고객인데 나한테 왜 그러느냐"고 토로했습니다.
수만 명의 대기 인원을 뚫고(?) 유심 무료 교체 예약에 성공했더라도 안심하긴 이릅니다.
SKT가 보유하고 있는 유심은 약 100만 개 정도인데요. 다음 달 말까지 약 500만 개의 유심을 추가로 확보할 계획이죠. 그러나 SKT 가입자 수만 약 2300만 명입니다. 이 회사 망을 사용하는 알뜰폰 가입자도 187만 명으로 교체 대상자는 모두 2500만 명에 달하는데요. 온라인으로 유심 교체 예약을 해도 언제 연락을 받을지 미지수라는 거죠. 물량 부족에 따른 혼란은 당분간 불가피할 전망입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젊은 층 사이에서는 '번호이동'도 적극적으로 고려하고 있습니다.
최근 각종 온라인 커뮤니티와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서는 KT, LG유플러스 등의 요금제에 대한 질문 글이나 '셀프 개통'에 대한 내용이 잇따라 올라오고 있습니다. '유심 무료 교체를 기다릴 수 없다', '못 믿겠다'는 취지로 다른 통신사로 번호이동을 하려는 것으로 풀이되는데요.
29일 통신업계에 따르면 전날 SKT 가입자 3만4132명이 다른 통신사로 이동했습니다. 8729명이 SKT로 새롭게 가입하면서 2만5403명의 가입자 순감소가 발생했는데요. SKT를 이탈한 가입자의 60%는 KT로, 40%는 LG유플러스로 이동한 것으로 분석됐습니다. 이날 KT에 새로 가입한 사람은 2만1343명이었고요. 1만4753명은 LG유플러스에 새롭게 가입한 것으로 나타났죠. 여기에 알뜰폰 이동 가입자까지 고려하면 이탈 규모는 더욱 클 것으로 보입니다.
온라인상에서는 "유심을 퀵으로 받을 수 있는 알뜰폰 통신사가 있다", "지금 번호이동 가능한 거냐. 상담원 연결이 안 된다", "유심이 있다면 셀프 개통도 가능하다" 등 수많은 질문과 조언이 오가고 있죠.
그나마 온라인 환경과 스마트 기기에 익숙한 젊은 층은 이렇게 정보를 나누며 혼란에 대응할 수 있는데요. 문제는 정보 사각지대에 놓인 노령층입니다.
한 시민은 온라인 커뮤니티를 통해 "SKT 대리점 가지 마라"며 분통을 터뜨렸습니다. 그는 "동네 대리점에 유심 재고가 없어서 연락처만 적어놓은 뒤 옆 동네 대리점에 갔다. 사진처럼 줄을 많이 서 있더라"며 "결국 (유심) 재고 없는 건 똑같으면서 T월드 홈페이지에서 신청하는 걸 안내하고 있더라"고 설명했습니다.
이어 "응대하는 직원은 한 명뿐이고, 줄 서 있는 사람들은 영문도 모르고 기다리고 있는 것"이라며 "밖에서 기다리다가 앞에 먼저 처리받고 나오는 분한테 물어봐서 결국 T월드 신청 (방법을) 알려주는 거였다는 사실을 인지했다"고 말했는데요.
특히 "어르신들 도와드리는데 눈 안 보이셔서 글자 엄청 확대돼서 페이지 제대로 안 보이는 경우가 부지기수고, 매크로 방지문자도 입력 못 하시는데, 진짜 주변에 도와줄 사람 없는 어르신들은 어떻게 하라는 건가 싶더라"고 꼬집었죠.
구독자 270만 명을 보유한 IT 유튜버 잇섭(ITSub)도 "유심 교체마저 매끄럽지 않다"며 "장년, 노년층 같은 디지털 취약 계층이 유심 보호 서비스에 직접 가입해야 하고 유심 교체받는 것도 생각보다 너무 힘들 거 같은데, 이런 분들을 위해 방문 서비스나 유심 택배 서비스를 하지 않는 게 아쉬운 부분"이라고 지적했습니다.
그는 "심지어 서버가 털린 건 SKT다. 근데 SKT를 이용하는 고객이 유심 보호 서비스도 직접 신청해야 하고 불편하게 대리점까지 가서 유심 교체를 해야 한다. 2023년에 LG유플러스에서도 비슷한 상황이 있었는데 이때는 고객이 원하면 택배로도 해줬다"고 짚었습니다.
더 큰 문제는 이번 사태를 아예 인지하지 못한 노년층도 상당수라는 겁니다. SKT는 25일부터 매일 500만 명씩 순차적으로 유심 보호 서비스 안내 문자를 보내고 있다는 설명인데요. '유심 교체 안내 메시지' 등의 제목으로 SKT 공지를 빙자한 피싱 문자도 횡행하고 있어 각별한 주의가 필요합니다.
안타깝지만 노년층의 디지털 소외 문제는 통신 서비스에 그치지 않습니다. 일상 속 즐거움인 문화생활에서조차 소외된다는 지적이 높았는데요. 프로야구를 대표적인 사례로 들 수 있죠.
프로야구는 지난해에 이어 올해도 뜨거운 인기를 자랑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온라인 예매가 어려운 노년층 야구 팬들은 이 열기에 동참하기 어렵습니다. 프로야구는 지난해 프로 스포츠 사상 최초로 1000만 관중을 유치했지만, 입장권 온라인 구매자 중 60대 이상은 1%대에 그쳤습니다.
통상 예매는 경기 당일로부터 7일 전부터 가능하지만, 구단들이 앞다퉈 선예매권을 출시한 점도 티켓팅에 어려움을 더했는데요. 1년 내내 정해진 자리를 선점할 수 있는 '시즌권'부터 일반 예매보다 몇 시간 앞서 예매할 수 있는 '선예매권'까지 등급도 다양하죠. 예매 시간을 더 세분화해 '선선예매', '선선선예매'까지 가능하게 한 구단도 있습니다.
다만 디지털 소외 계층을 포용하려는 의의 있는 시도도 포착됩니다.
롯데 자이언츠는 지난해부터 KBO리그 최초로 디지털 취약 계층을 위해 티켓 매진 여부와 상관없이 경기당 입권 100장씩을 확보, 현장 판매했는데요. 반응이 좋아 올해는 테이블석을 포함해 전체 좌석의 1%인 220장을 현장 판매분으로 운영하고 있습니다. 매 경기 3루 매표소에서 만 65세 이상 신분증 제시 고객에게 판매하죠.
kt 위즈도 70세 이상을 대상으로 100장씩 현장 판매를 시작했고요. KIA 타이거즈 역시 1루·외야석 등 일부 좌석을 현장에서 판매하고 나섰습니다.
디지털 취약계층의 현장 관람이 어려워지는 만큼, 모두가 함께 야구를 즐길 수 있도록 접근성을 높이자는 취지가 빛나는데요. 이처럼 전 분야에서 디지털 세대 차를 고려한 대응책에 관심이 필요한 시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