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주의 키워드] 타협(妥協, Compromise)-한국 정치인의 DNA에 결여된 바로 그것

입력 2016-06-02 1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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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숭호 언론인

한국 정치인들의 핏줄과 DNA에는 타협과 대화의 인자가 없음이 분명하다. 어느 때보다도 타협과 대화를 통한 ‘협치’의 중요성이 강조되고 있는 20대 국회가 개원했음에도 협치의 싹은 기대할 수 없는 지경이 되었기 때문이다. ‘상시 청문회’법 개정안에 대한 대통령의 거부권 행사와 “협치는 기대하지 말라”는 야당의 극렬한 반대는 이번 국회 역시 19대 국회처럼 ‘식물국회’ ‘불임국회’가 되리라는 불길한 예측의 첫 징조이다.

DNA에서 타협과 양보를 찾아보기 어려운 한국의 정치인들은 혹시 영국의 첫 여총리 마거릿 대처(1925~2013)의 말을 금과옥조로 삼고 있는가? 1979년부터 12년 동안 보수당 당수로서 영국을 이끌었던 그는 “남들이 좋아해주기를 바라는가? 그렇다면 언제 어떤 사안에 대해서도 타협할 준비를 해라. 다만 아무것도 이루지 못할 것임은 명심하라”고 말했다.

1982년, 반전 여론이 비등했음에도 불구하고 포클랜드 전쟁을 밀어붙여 아르헨티나에 승리했던 ‘철의 여인’다운 말이기는 하지만 한국 정치인들이 교훈으로 삼을 것은 아니다. 왜? 한국의 정치인들 대부분은 ‘남들이 좋아해주기를 바라면서도 타협은 하지 않으려는 이중적인 사람’들이어서이다. 누구라고 굳이 예를 들 필요는 없겠다. 여의도에서 돌멩이를 던지거나 침을 뱉었을 때 맞은 사람이 바로 그 사람일 수 있을 터이니.

타협을 바람직하지 않은 것으로 여긴 사람은 대처 외에도 여럿 있다. 문명비평가로서 저서 ‘편견집(Prejudices)’에 험구로 수많은 독설을 남겼던 헨리 루이스 멩켄(1880~1956)은 “정치인은 직업적으로 존경을 받지 못할 사람들이다. 그들은 높은 자리 부근이면 어디든 얻어 차고자 어떤 창피라도 무릅쓰고 헤일 수 없이 많이 타협한다. 그들과 매춘부들을 구분할 수가 없다”고 했다. 정치인이라면 모름지기 타협하지 말아야 하고, 그렇지 않으면 매춘부나 다름없다는 멩켄은 많은 정치인들이 ‘타협’이라는 명목으로 하지 말아야 할 일, 해서는 안 될 일을 저지르고 있음을 짚었을 게다.

멩켄과 동시대에 활동하면서 ‘브라운 신부 시리즈’로 우리나라 추리소설 독자들에게도 이름이 꽤 알려졌을 영국의 소설가 길버트 체스터튼(1874~1936) 역시 멩켄 못지않은 독설가이다. 그는 “원래 타협이란 빵이 하나도 없는 것보다는 반 덩어리도 있는 게 좋다는 뜻이다. 하지만 정치인들에게 타협이란 빵 한 덩어리보다 반 덩어리가 더 좋다는 뜻이다”고 했다. “정치인들에게는 전체를 위한 한 덩어리의 빵보다는 내 손에 있는 반 덩어리가 더 가치 있다”는 말로 그들의 탐욕과 부패 성향을 질타한 것이다.

알랭 드 보통의 저서를 통해 한국 젊은이들 사이에 더 유명해진 영국의 미술 비평가 존 러스킨(1819~1900)은 “평화를 얻는 방법은 쟁취하거나 사는 것 둘뿐이다. 쟁취하라, 악을 물리치고! 사들여라, 악과 타협해서!”라고 했다. 아니, 타협이 악과 함께 움직인다니? 하지만 노르웨이 극작가로 ‘인형의 집’을 쓴 헨리크 입센(1828~1906)은 러스킨보다 더 나가 “타협은 악이다”고 단언했다.

선율과 가사가 아름답기만 한 ‘솔베이지의 노래’의 원전인 ‘페르귄트’를 쓰기도 한 입센이 타협을 악으로까지 전락시킨 이유가 궁금한데, 영국의 저널리스트이자 역사학자인 폴 존슨이 그의 저서 ‘지식인의 두 얼굴’에서 밝힌 입센의 평이 도움이 될 만하다. 존슨은 입센의 ‘인형의 집’이 ‘여성해방운동’을 촉발하긴 했지만 입센에게는 여성해방이라는 개념이 아예 없었으며 오히려 여성을 비하하고 이기적으로 이용했고, 그가 ‘인형의 집’을 쓴 것도 출세를 위한 목적에서였다고 폄훼했다. 한마디로 그는 허위와 위선의 인물이었다는 것이다. 존슨의 분석을 통해 “타협은 악이다”라는 입센의 주장을 더듬어보면 어떤 그림이 그려지나? 위선과 허위와 이기적인 사람에게는 타협이 언제나 악(자기 기준의)으로 보일 수도 있지 않았을까?

좋은 것인 줄로만 알고 있고, 삶에서 반드시 필요한 것으로 알았던 ‘타협’에 대해 왜 이렇게 부정적인 경구들만 있을까? ‘원칙에 대한 타협’과 ‘임시방편의 타협’이 구분되기 때문이다. 인도의 성자 마하트마 간디(1869~1948)는 “모든 타협은 주고받기(Give and Take)이다. 그러나 원칙에 대해서는 주고받기가 있어서는 안 된다”고 했다. 이런 자신의 원칙을 지키느라 그는 1942년 인도를 지배했던 영국과의 타협을 거부하면서 그 유명한 ‘불복종 운동’을 주도, 73세에 다시 투옥돼 2년 가까이 옥고를 치렀다. ‘마하트마’는 ‘위대한 영혼’이라는 뜻으로 인도의 시성 타고르가 간디에게 헌정한 이름이다. 위대하려면 최소한 원칙은 양보하지 말아야 함을 알려준다.

‘임시방편의 타협’에 대해서는 프랑스 극작가 몰리에르(1622~1673)가 말한다. “하늘은 우리에게 어떤 쾌락은 금지했다. 하지만 타협으로 우리는 그것들도 즐길 수 있다.” 원칙을 어기면 쾌락과 이익이 따라오지만 그것은 임시적일 것이다.

그런데 타협이 악이 되지 않으려면? “모든 사람이 타협의 과정에 참여하고 기여했을 때, 그때의 타협이 좋은 타협이다. 정치인들은 모름지기 그런 타협을 이끌어내도록 힘써야 한다”는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1954~ )의 말이 대답이 될 것이다. 그는 타협과 화합의 정치인으로 불리기도 한다.

한국 정치에 진정한 타협이 없는 이유는 ‘그들만의 타협, 원칙도 무시하는 타협’을 타협하려 하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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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일보 편집국 부국장, 코스카저널 논설주간, 뉴시스 논설고문, 신문윤리위원회 전문위원 역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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