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4년 4월 조선총독부의원 간호부과에 입학하여 1916년 10월에 졸업했다.
졸업 후에는 조선총독부의원의 간호부로 근무했다. 일본인 의료진과 환자가 태반인 곳에서 박자혜는 민족 문제를 고민했을 것이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동료 간호부들과 함께 ‘간우회(看友會)’를 조직하고 만세운동을 주도하였다. 경찰은 박자혜를 ‘과격한 말을 하고 다니는 자’로...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의 강제 징집으로 집결한 조선인들이 눈물로 고국을 떠나 착취당해야 했던 아픔의 장소. 바로 서울 용산역입니다.그리고 이곳에는 지난달 8월 국내 처음으로 강제징용 노동자상이 세워졌죠.
아버지를 붙잡고 불안한 눈빛을 하고 있는 소녀.앙상한 몸에 한 손에는 망치를 들고 있는 날카로운 눈빛의 아버지.
같은 달 인천 부평공원에도...
학교의 주도권은 조선총독부로 넘어갔고, 학교 명은 경성여자고등보통학교로 변경되었다.
교육에 뜻을 잃은 윤정원이 택한 것은 망명의 길이었다. 1911년 봄 그녀는 어린 아들을 품에 안고 사고무친 중국 베이징으로, 남편은 서간도로 떠났다. 윤정원은 음악과 외국어 교습으로 생계를 마련하였다는데, 살림이 그리 궁색하지는 않았나 보다. 중국에서 독립운동하는...
조선총독부는 일본보다 역사가 앞선 삼국사기 초기 기록을 불신하는 78개 소국이 난립한 삼한설로 서기 3세기 전에는 한반도 남쪽에는 신라, 백제, 가야가 없었다고 역사를 조작해, 임나일본부 설치 근거를 제시했다. 그런데 동북아역사재단이 국고 10억 원을 투입하여 추진한, 소위 ‘하버드 프로젝트’의 내용은 한반도 북부에는 중국의 한사군이, 한반도 남부에는 삼국이...
심우장은 한옥으로는 드물게 남향이 아닌 북향을 바라보고 있는데요.이는 남향에 위치한 조선총독부를 바라보지 않겠다는 만해 한용운의 뜻이 반영된 것입니다. 끝내 떠나간 나의 님, 조국을 되찾지 못하고 1944년 심우장에서 생을 마감한 만해 한용운의 정신은 자유로이 열린 심우장 곳곳에서 느낄 수 있습니다.
‘나는 내 것이 아름답다’...
일제는 1910년 조선을 병탄한 이후, 조선총독부를 두어 조선을 다스리면서 이미 그들의 나라가 되어 버린 조선을 그 이전의 조선, 즉 1910년 이전의 조선과 구분하기 위해 ‘이씨조선’이라는 말을 만들어 낸 것이다. 그러고선 대수롭지 않은 양 “이씨가 세운 조선이니 이씨조선이라고 부르는 게 맞다”고 가르쳤다. 따라서 ‘이씨조선’은 우리에게는 치욕스러운 말로...
일본은 아직도 한국을 일제가 강점하고 있던 조선총독부 시절의 ‘조선’으로 인식하고 싶어 하는 것이다.
일본의 미술관이나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는 유물에 대한 국적 표기를 보면 그들의 인식을 보다 더 분명하게 확인할 수 있다. 유물에도 어김없이 ‘한국’ 대신 ‘조선’이라고 쓰고 있다. 한국의 ‘조선’시대 유물이기 때문에 ‘조선’이라고 표기하는 게 아니라...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조선총독부가 쌀 배급제를 시작하면서 간판을 내려야만 했다. 너무 빨리 찾아온 시련이었다.
하지만 좌절하지 않았다. 곧바로 아산서비스공장을 열고 영업을 시작했다. 물론 이 또한 만만치 않았다. 애써 꾸민 공장엔 불이 났고, 늘 자금난에 시달렸다. 조선총독부는 공장 허가를 빌미로 몽니를 부렸다. 결국 아산은 개점 3년 만에 문을 닫았다....
조선총독부의원에서 2년 근무한 후에야 면허를 취득한 그는 다들 기피하는 마취 일을 전담하면서 외과의사로 대성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했다.
1928년 동경대에서 한국인으로서는 세 번째로 의학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그 뒤 총독부 추천으로 6개월 동안 독일 의학계를 시찰한 후 다시 유학길에 올랐다가 돌아오고 나서 서울 저동에 백외과의원을 개업했다....
동아일보 편집국장으로 재직할 때 제3차 조선공산당(ML) 책임비서가 됐다가 7년간 옥고를 치른 후 풀려나면서 공산주의와의 결별을 결심했다. 동아일보 ‘일장기 말소사건’에도 관련돼 총독부에서 고문을 당한 그는 신문사 취업 금지령까지 받았다. 그는 송진우 사장(1890. 5.8~ 1945. 12.30)과 함께 사임한 뒤, 광복 때까지 경기도 전곡에서 해동농장을 관리했다....
제1세션은 ‘조선총독부제령 제2호, 그 후 100년 - 반성적 검토’라는 주제로 열린다. 정태헌 고려대 한국사학과 교수가 ‘일제강점기 주조업과 주세정책’에 대해 발표하고, 김호균 명지대 경영정보학과 교수가 지정토론에 나선다.
이와 함께 ‘일제강점기 주세령의 문화적 함의’에 대해서 구사회 선문대 교수가 발표하고, 김선보 한국외대 교수가 지정토론에 나설...
보기는 ① 국채 보상 운동을 지원하였다, ② 최초로 발행된 순 한글 신문이었다, ③ 대한민국 임시 정부의 기관지 역할을 하였다, ④ 조선 총독부의‘문화 통치’방침에 따라 창간되었다, ⑤ 을사늑약의 부당성을 논한 시일야방성대곡을 게재하였다 등이었다. 이 중 평가원이 정답으로 제시한 것은 1번 ‘국제 보상 운동을 지원하였다’이다.
글쓴이의 주장은 14번...
전두환·노태우 전 대통령 구속과 조선총독부 건물 철거도 한몫했다. 잘나가던 김 대통령은 IMF라는 직격탄을 맞았다. 집권 말기에는 차남 김현철 씨가 정태수 회장의 한보건설과 당진제철소 등에 대한 정부 지원 및 대출 청탁과 국정감사 무마 청탁 명목 로비에 연루돼 금품수수, 세금포탈 의혹을 받으면서 6%의 지지율로 임기를 마무리했다.
김대중 정부는 IMF사태를...
부민관 의거는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 관립극장인 부민관(현 서울시의회 자리)에서 친일 부역자이자 정치깡패인 박춘금 등의 주최로 일본 고위 관료들이 집결한 ‘아세아민족분격대회’가 열리던 중 20대 애국 청년들이 사제폭탄을 터트린 사건이다. 박춘금이 일제를 위한 궤변을 토하는 순간 요란한 폭음과 함께 장내는 아수라장이 됐다. 이 의거는 한국...
나석주의 ‘동양척식주식회사 폭탄 투척’을 비롯하여 지금도 전설처럼 회자되어 영화 ‘밀정’의 첫 장면에서 오마주되었던 김상옥의 ‘종로경찰서 습격사건’, 탄압의 심장부 조선총독부에 폭탄을 던지고 유유히 사라졌다가 동지들 곁으로 살아 돌아오겠다고 한 약속을 지킨 김익상의 의거 등이 의열단의 눈부신 전과들이다. 이런 ‘의열’의 전통은 임란 의병에서...
경술국치 후에는 조선총독부 토지조사국에서 감사관으로 활동했다. 진주군수를 시작으로 동래군수, 충남 및 경북 참여관을 지냈으며 충북도지사와 황해도지사를 거쳐 중추원 참의를 수차례 중임했다. 관직에서 물러난 뒤에도 기업인으로 관변단체에서 계속 활동했다. 특히 태평양전쟁 중에는 조선임전보국단, 국민동원총진회 등 전쟁 지원 단체에 적극 가담했다. 이...
이덕일 역사학자·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 소장
조선총독부 직속의 조선사편수회는 중국 한나라가 (위만)조선을 멸망시키고 세운 한사군(漢四郡)의 위치를 한반도 북부라고 확정지었다. 한국사는 식민지의 역사로 시작되었으니 일본의 식민지가 된 것은 역사적 귀결이라고 주장하기 위한 것이었다. 문제는 해방 후에도 친일청산에 실패하면서 이런 식민사관, 즉...
일제는 1916년 7월 25일 조선총독부제령 제2호로 주세령을 제정하고 9월 1일 발령했다. 이에 앞서 일제는 통감부를 통해 1909년 주세법을 공표해 세원 파악 등의 준비를 했다. 그리고 1916년 주세령을 통해 본격적으로 주조면허제 시행, 주세 부과, 술의 새로운 분류체계 도입, 원료판매 통제 등을 단행했다. 이에 따라 우리 술 문화와 관련 산업은 지각 변동을 겪게 됐다....
그리고 임나일본부란 것은 임나를 지배하기 위해 야마토 왜가 임나에 둔 통치기구라고 하여, 근세의 조선총독부와 같은 성격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임나는 가야와는 다른 나라로 결코 한반도에 있지 않았으며, 일본 열도에 있던 마을 규모의 나라에 불과했으니 이를 간단히 밝히기로 하겠다.
임나가 처음 등장하는 것은 ‘일본서기’의 제10대 스진(崇神)왕 65년...
옛 국세청 남대문별관은 1937년 일제 조선총독부 체신국 청사였으며, 국유재산 교환대상물건으로 확정돼 서울시로 넘어왔다.
서울시 관계자는 “이번 사업을 통해 대한제국의 숨결을 회복하고 세종대로 일대 역사성을 회복하는 것은 물론 과거의 역사를 시민들과 함께 공유하는 문화공간을 만들어 나갈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