꼭 동일인인지는 확신할 수 없지만 지공에게서 계를 받을 정도였다면 역시 왕가나 문벌귀족의 딸이 아니면 불가능했을 것이므로, 그녀였을 가능성도 없는 게 아니다. 묘덕은 고려시대 불교문화의 발전에 여성들이 얼마나 큰 기여를 했는가를 보여준다.
공동기획: 이투데이, (사)역사 여성 미래, 여성사박물관건립추진협의회
그런데 여기서 주목하고 싶은 것은 그녀와 남편이 다시 부부로 살았다는 점이다. 병자호란 때의 환향녀(還鄕女)들이 단지 포로로 잡혀갔다 돌아왔다는 이유만으로 이혼을 당했음을 생각해 보라! 여기서도 조선과 다른 고려의 성 관념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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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씨가 산 시대는 무신 집권기와 몽골의 침입 등으로 매우 어수선했다. 또 술 좋아하고, 출세가 늦은 남편 때문에 몸과 마음이 몹시 고생스럽기도 하였다. 그녀의 삶은 무신 집권기 중하급 관료 부인의 삶을 잘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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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엄은 전쟁이 일상화한 6세기에, 특히 격전지였던 충주에 살면서 전쟁의 참상을 직·간접적으로 겪었을 것이다. 죽음을 일상적으로 목격하면서 아엄은 인생의 무상함과 함께 불교에 깊이 심취하면서, 전쟁이 없는 불법이 가득한 내세를 꿈꾸었던 것이 아닐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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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황사에 모셔진 천수관음의 영험담을 이야기하고자 한 것이겠지만, 여기서는 불치병의 자식을 위해서 기도밖에는 할 수 없었던, 자식이 광명을 찾게 되기를 간절히 바랐던 그 ‘희명’의 마음이 이름처럼 전해오는, 가진 것도 기댈 곳도 없었던 통일신라시대 여성의 절절했던 모정을 주목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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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하대 구산선문 가운데 두 선문이 단의장옹주의 후원으로 성장하였음을 알 수 있다. 단의장옹주는 일찍이 혼자가 되었지만 절망하지 않고, 개인적인 슬픔을 종교로 승화하여 신라 하대 불교계에 중요한 영향을 끼쳤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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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명부인이 두 집안의 가교 역할을 한 것이다. 묵묵히 자신의 삶을 살았던 천명부인은 아들 김춘추가 왕위에 오른 뒤 문정태후(文貞太后)에 추존되었다. 다른 자매들이 왕과 왕비가 되었다면, 천명부인은 왕모(王母)로서의 지위를 누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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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회사의 주인은 주주인데, 오늘 이렇게 주주들의 요청으로 주총이 열리는 건 역사적인 일”이라고 강조했다.
주총장 1층에는 다양한 연령층과 성별의 사람들이 모여있었다. 혼자 온 사람도 많았지만, 부부가 함께 온 사람들도 있었고, 유모차를 끌고 온 여성들도 눈에 띄었다. 홀로 참석했다는 40대 주주 B씨는 “안건 통과를 바란다”며 “공매도 문제로 머리가...
1989년 히로히토(裕仁) 일왕이 사망했을 때는 “왜 사죄도 않고 죽었냐”는 말을 하기도 했다. 배봉기는 평생 두통과 우울증에 시달렸고 한곳에 정착하지 못한 채 떠돌면서 살다가 1991년 10월 오키나와 자택에서 별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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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경원은 “경계도 없고 신분 고하도 없는 창공을 날고 있노라면 뭐든지 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든다”고 말하곤 했다. 그리고 그렇게 사랑했던 하늘에서 생을 마감했다. 영화 ‘청연’(2006)의 주인공이 박경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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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9년 귀국한 뒤에는 공군 창설에 참여하는 한편 역사를 기록하는 ‘한국연감’을 발간하고 장학사업을 하였다. ‘권기옥장학금’의 우선순위는 항공인재와 여학생, 역사의식이 올곧은 젊은이였다. 권기옥이 자신의 삶을 보여주는 방식이었다. 1988년 4월 19일 별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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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계월은 ‘가십난’을 통해 이윤을 좇는 황색 저널리즘을 비판하면서 저널리즘의 윤리적 책임을 제기하고 신여성을 괴롭히는 소문을 정치학으로 쟁점화하고자 하였다. 그러다가 1933년 5월 31일 고향에서 장결핵으로 사망했다. 23세, 너무 이른 죽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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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락을 목격한 박자혜는 조선총독부의원의 간호부로서 민족차별을 겪었고, 3·1 만세운동을 주도하면서 ‘민족’의 저항과 단결된 힘을 알았다. 가정을 돌볼 수 없었던 신채호와의 결혼과, 그에 대한 묵묵한 지원은 항일활동을 사명으로 여겼던 박자혜의 필연적 실천 방식이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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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논란에 굴하지 않고 단체 활동에 관계하거나 중국을 오가거나 배우 활동을 하며 살았다. 강향란 이후 단발을 선택하는 여성은 늘어갔다. 이들에게 단발 행위는 전통적인 조선여성의 삶을 넘어 여성이 직접 꾸려가는 새로운 삶을 의미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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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릉은 본래 경기도 파주의 장릉(長陵, 인조와 인렬왕후의 능) 옆에 있었는데 풍수지리상 불길하다고 1856년(철종 7) 10월 11일 현재의 서울 서초구 내곡동에 위치한 헌릉(獻陵, 태종과 원경왕후의 능)의 오른편 언덕으로 옮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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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 경험으로 정치 감각이 있었고 늘 명분을 중시했다. 그녀의 정치적 리더십이 일반 백성을 위한 여러 정책에 발휘되었다면 후세 그녀에 대한 평가가 좀 더 긍정적이었을 것이다. 정순왕후는 1805년(순조 5) 1월 12일 61세를 일기로 창덕궁에서 승하하여 영조의 원릉(元陵)에 합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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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는 선왕 영조가 사랑했던 사람이며 선왕의 성덕(聖德)에 누가 될까 염려하여 끝내 사약을 내리지 않았다.
마침내 1799년(정조 23) 3월 4일 62세가 된 화완옹주를 용서하라는 하교를 내렸다. 그 후 화완옹주는 서울 도성에 들어와 살게 되었으며, 1808년(순조 8) 5월 17일 71세에 생을 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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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영조의 부마가 되었는데도 항상 겸손하고 검소하였다. 그가 39세의 나이로 병사하자 영조는 매우 슬퍼하며 정효(貞孝)라는 시호를 내려주었다. 그는 슬하에 자녀가 없어 맏형 한정(漢楨)의 셋째 아들 이주(頤柱)를 후사(後嗣)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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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골 부인들이 쓰는 관(冠)인 고고(姑姑)를 내려주자 그녀는 고고를 쓴 채 큰 잔치를 베풀어 자신의 위세를 과시했다. 충선왕의 또 다른 후비인 순비(順妃)가 몽골로부터 고고를 하사받은 기념으로 연 축제에서 숙창원비는 순비에게 지기 싫어 옷을 다섯 번이나 갈아입었다고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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