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수란 도성의 성곽을 수비하는 것을 뜻하는 용어로 조선의 도성 수비는 선조 때 임진왜란과 인조 때 병자호란을 겪으며 중요한 문제로 대두되었던 바 있다.
파수 의식은 인정(매일 밤 10시쯤 28번 종을 쳐 성문을 닫고 통행금지를 알리는 것)과 파루(매일 새벽 4시에 33번 종을 쳐 통행금지를 해제하는 것)때 도성문을 여닫는 개폐의식과 순라(도둑·화재 따위 예방을...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은 국제 정세의 흐름 속에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고 쳐도 소현세자 일가가 풍비박산 난 것을 생각하면 권력을 위해 아들마저 버린 비정한 아버지 인조의 모습을 떠올리게 된다.
청나라에 볼모로 끌려갔던 소현세자와 세자빈 강 씨는 포로로 잡혀간 백성들을 몸값을 주고 구출해 농사를 짓게 했다. 그리고 청나라와 조선의 무역을 적극적으로 추진해...
구한말의 의병장이었던 유학자 김복한(金福漢·1860.7.24~1924.3.29)은 병자호란 때 강화성에서 순절한 문충공 선원(仙源) 김상용(金尙容·1561~1637)의 12대손이다. 선비의 매운 지조와 의열(義烈)의 피를 타고난 셈이다. 그런 분답게 60평생을 옥살이로 일관했다.
그는 1892년 별시 과거에 급제해 홍문관교리가 된 뒤 홍문관, 사간원, 승정원에서 일하다 1894년...
병자호란 후인 1637년 아우 봉림대군과 함께 청나라에 인질로 끌려갔다가 8년 만에 귀국했지만 불과 두 달 만인 1645년 5월 21일(음력 4월 26일) 33세로 급서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병이 갑자기 위독해져 죽었다고 돼 있으나 염습(斂襲)에 참여했던 이가 “시신이 온통 검은빛이었고 이목구비에서 피를 흘리고 있어 약물에 중독된 것 같았다”는 증언을 남겼다는 기록이...
조선시대에 도성을 지키던 성으로 산세를 그대로 이용해 병자호란 때 인조가 청나라군과 대치하며 47일간 이곳에서 격전을 벌였다” 고 한다. 그 중 수어장대는 산성 축성 당시 동서남북에 세워진 4개의 장대중 으뜸가는 장대이며, 현재 유일하게 남아있는 장대이다.
새로움은 늘 설렘과 두려움을 동반한다. 적어도 새해 아침에는 두려움보다는...
광해 폐위를 비롯해 인조반정과 병자호란, 삼전도의 굴욕에 소현세자 독살 등 ‘화정’이 위기와 갈등으로 출렁일 때마다 강주선 캐릭터는 이 같은 서사의 배경이 되는 역할을 담당하며 카리스마를 번뜩이고 있지만 촬영장에선 오히려 웃음이 끊이지 않는 편이다. 서슬 퍼런 악역을 담당하고 있는 만큼 그에 따르는 에너지 소비도 상당하지만 선후배 가리지 않고...
병자호란이 끝난 뒤 끌려간 청나라에서 백로를 맞아 쓴 시다. “보이는 것 모두 처량한 백로 때라/이국땅 가을 풍경 슬픔을 못 이기겠네/사람살이 하루 보내기도 어려운데/잘못하여 백년 기약을 하였구나.”[滿目凄凉白露時 異鄕秋景不勝悲 人生一日猶難遣 枉作平生百歲期].
택당(澤堂) 이식(李植)의 ‘일직 마을의 권씨 별장에서 경물을 읊다’[一直村權氏莊詠物] 2수 중...
앞서 공개된 '화정' 41회 예고편에서는 '병자호란'이 발발했음을 암시하며 긴장감을 극으로 끌어올린 상황.
이런 가운데 공개된 스틸에는 다급하게 피난길에 오른 왕실 사람들의 모습이 담겨있어 관심을 모은다.
특히 정명과 봉림은 서로 마주보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고, 그 표정에 절박함이 묻어나 위기감을 고조시킨다. 아울러 불안한 표정으로 정상궁(김영임 분)...
한편 '소현세자'는 인조의 장남으로 병자호란 후 봉림대군과 함께 청의 볼모로 끌려갔다. 심양의 세자관에 머물면서 많은 고초를 겪지만 동시에 조선과 청나라 사이 외교 일선에서 큰 역할을 했다. 항복한 나라의 세자였지만 의연하고 당당한 모습을 잃지 않으며 새로운 문물을 적극적으로 수용하는 등 위기를 기회로 만들 줄 아는 진취적인 기상을 보여줬다는 평가다....
또 광해군이 적절한 외교정책을 펼쳐 조선과 후금이 마찰없이 지냈던 것과 달리 인조와 서인정권이 친명배금(親明排金) 정책을 취하면서 결국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을 불러와 조선을 또다시 전쟁 속에 몰아넣었다.
한편 21일 방송된 MBC 월화드라마 '화정'은 능양군이 반정으로 왕위에 오르고, 광해가 폐위되는 인조반정을 그려 시청자들의 몰입도를 높였다....
이후 병자호란을 비롯해 국가적 환란에 목숨 걸고 나선 이들의 숫자는 급감했다.
우리나라의 경제를 움직이는 정부, 대기업 등이 ‘양치기 소년’의 행태를 보이는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현실이다. 이렇게 자신들의 목적 달성만 하면 그만인 행태는 반드시 경로 의존성을 가진다. ‘양치기 소년’은 진짜 늑대가 나타났을 때 아무도 오지 않아 결국 늑대에 죽음을 당했다.
조선시대 현종에서 숙종에 이르는 시기에 소빙하기가 닥쳐 대기근이 발생한 것은 물론 병자호란의 간접적 원인이 됐다는 말을 들은 기억이 나네요. 현재는 온난화에 따른 슈퍼 엘니뇨로 식품가격이 급등할 것이라는 우려도 제기되고 있는 상황입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그리 많지는 않겠지만 기후변화의 심각성을 한번쯤 생각해보고 이를 해결하려는 정부나...
임진왜란 직후 태어나 병자호란, 인조반정 등 굵직한 사건을 겪으며 권력 암투의 회오리에 휘말렸다.
특히 광해군이 즉위한 후 영창대군을 역모죄로 사사하고 정명공주의 어머니인 인목대비를 서궁으로 폐출시킬 때 함께 감금됐다.
인조반정 후 공주로 복권되고 중추부동지사 홍원의 아들 주원에게 시집을 갔다. 이후 인목대비가 사망한 후 궁중에서 무도한...
그러나 1636년 후금이 국호를 청으로 바꾸고 조선에 군신관계를 요구하자 조선 조정은 척화주전론으로 기울었다. 그 해 겨울 청태종이 침략해왔다. 이것이 조선의 항복이라는 치욕을 부른 병자호란이다. 병자년에 시작돼 이듬해인 정축년에 끝났다 해서 병정노란(丙丁虜亂)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1637년 1월 병자호란 당시 남한산성에서 나와 항복한 인조는 청태종에게 무릎을 꿇고 양손을 땅에 짚은 뒤 머리가 땅에 닿을 때까지 숙이기를 세 번, 이것을 한 단위로 세 번 되풀이했다. 그 씻을 수 없는 치욕은 인조의 무릎과 조선의 역사에 깊이 새겨졌고, 서울 송파의 삼전도비에 고스란히 남았다.
운디드니 대학살사건도 생각한다. 1890년 12월 29일, 미 제7기병대...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라고 저항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한국 최초의 TV 일일연속극인 ‘눈이 나리는데’ 매일 저녁 7시40분부터 20분씩 반영
영남지방에 50년만의 대폭설
국립대학설립안 반대, 동맹휴학 시작
서재필과 함께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를 이끌었던 윤치호 사망
병자호란 발발
조선총독부, 국세조사결과 10월 1일 현재 조선인구는...
‘최종병기 활’이 병자호란을 배경으로 만들어진 영화인 만큼 2, 3편은 임진왜란과 일제강점기를 배경으로 그리고 싶었다. 외부적 변수에 의해 우리 민족이 힘든 시기였고, 그 안에서 활처럼 꺾이지 않는 정신력을 주 소재로 영화를 만들고 싶었다”고 말했다.
김한민 감독의 말처럼 그의 작품은 한 편으로 끝나지 않는다. 그 영향력과 파급력을 일관성 있게 속편에...
반정공신 이괄의 난으로 한양을 떠나 피난해야 했고, 정묘호란 및 병자호란에 패해 오랑캐라 부르던 후금에 치욕을 겪었다. 백성들은 수시로 피난길에 오른 비겁한 왕을 싫어했고, 공신들은 왕을 좌지우지하려 했다. 이러한 가운데 천성적으로 예민하고 의심이 많았던 그의 신경질과 불안증은 점점 더 커져만 가, 결국 아무도 믿지 못하며 무서운 망상에 시달린다. 자신과...
병자호란 때 조선의 왕 인조가 청나라에 대항한 곳으로 잘 알려져 있으며, 1950년대에 이승만 대통령에 의해 공원화된 후 현재 도립공원으로 지정되어 많은 시민들이 찾는 장소가 됐다.
남한산성의 역사는 삼국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한때 백제의 수도 하남위례성으로 추정되기도 했던 남한산성은 백제의 시조 온조왕이 세운 성으로 알려졌으나, 신라...
문화재위원회 세계유산분과위원장인 이혜은 동국대 교수는 “남한산성은 일상적인 왕궁과는 별개 산성이면서도 병자호란 때는 왕이 일상적으로 거주한 왕궁이라는 ‘비상 왕궁(emergency palace)’이라는 점을 높이 평가받았다”며 “이런 산성은 세계적으로 남한산성밖에 없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