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15년(태종 15)에 정문(旌門)이 세워졌다.
현재 경남 창녕군 도천면 도천리 산 133번지에는 경상남도문화재자료 제183호인 ‘열효신씨지려비석(烈孝辛氏之閭碑石)’이 서 있어 신사천 부녀의 충과 효, 열을 기리고 있다.
공동기획: 이투데이, (사)역사 여성 미래, 여성사박물관건립추진협의회
감정이겠으나 계국공주는 고려의 왕위를 좌지우지할 정도의 원나라 공주였다는 점에서 정치적 파장이 컸다. 그녀는 ‘왕이 공주와 결혼한 뒤 부부관계를 꺼렸다’고 사료에 언급될 정도로 왕의 사랑을 받지 못하였다. 고귀한 신분이었으나 여성으로서는 매우 불행한 삶을 살았다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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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나라의 왕비를 단지 질투에 의해 죄인으로 만들어 폐비하고, 심지어 원나라 남자와 결혼까지 시켜버렸다는 것은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일이다. 약소국의 비애라 해야 할까? 조비는 고려왕조 5백년간 가장 불행한 왕비 중 한 명이었다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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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가 오면 누구나 할 수 있을 것이다”라며 노비 반란을 주동하기도 하였다.
고려시대에 노비는 생살여탈(生殺與奪)이 주인 손에 달려 있던 ‘살아 있는 재산’이었다. 그들의 꿈은 양인이 되는 거였고, 평량의 처는 신분제의 동요와 함께 그 꿈을 실현하려 하였다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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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이 죽은 이후 비빈(妃嬪)들의 삶은 어떠할까. 수원 권씨는 머리를 깎고 비구니가 되어 절에서 거주하며 명복을 비는 일을 업으로 삼았다. 왕의 죽음과 관계없이 할 수 있는 일과 해야 할 일이 남아 있었다. 이는 그에게 또 다른 삶의 의미가 되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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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광정이라는 궁궐 안의 우물이었는데, 김정란의 이름이 뜻하는 의미 역시 우물과 난초의 향기이다. 김정란과 묘정이 동일 인물이었을 것으로 추정하는 이유이다. 김정란에 대한 사람들의 동정과 관심을 잊지 않고 기억하기 위해 설화로 전한 것일까. 역사적 사실과 설화의 경계에 김정란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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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화왕후는 태자비였고, 왕후였으며, 태후였다. 그러나 왕후와 태후로서의 영광의 나날은 짧았고, 남편과 아들의 죽음은 아프고 무참했다. 영욕으로 점철된 삶이다. 이를 견디는 것은 또 다른 단계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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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죽음은 누구도 어찌할 도리가 없다. 성목태후가 살아서 태후의 지위를 누렸다 하더라도 아들과 손자 간의 왕위 쟁탈전에 평안할 수도 없었을 것이다. 성목태후의 이른 죽음이 마냥 안타깝지만은 않은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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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찰 건립과 탑의 조성을 통해 간절히 바랐던 것은 살아 있는 이의 복과 죽은 이의 명복이었다. 간절한 기원의 끝에는 선업(善業)을 쌓아 성불(成佛)하고 부처님이 계신 이상 세계인 불국토(佛國土)에 가고자 하는 꿈이 있었다. 불국토를 꿈꾸는 것은 누구에게나 허용되는 자유였고, 평등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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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일은 나에게 20년 동안이나 마음 아픈 일이었다.”라고 하였다.
대야성 전투는 나당연합과 백제와 고구려의 멸망, 발해와 통일신라의 남북국 성립으로 이어지는 소용돌이의 서막이었다. 고타소랑의 죽음은 그 결정적 계기였고, 명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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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락의 친인척 중 정부가 추서한 독립운동가는 무려 25명이나 된다. 사진 한 장 변변히 남기지 못한 그는 아내로 며느리로 어머니로 누이로, 그가 처한 자리에서 가족과 함께 항일투쟁에 열과 성을 다한 여성독립운동가다. 2001년에 추서된 건국훈장 애족장이 작으나마 위로가 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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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4년 옌안(延安)의 화베이조선독립동맹에서 자료 수집 간사로 활동하였으며, 1945년 1월 중국의과대학에 입학하였다. 해방 후 하얼빈에서 의사 생활을 하다 한국전쟁에도 참전하였다. 다롄(大連)에서 1999년 95세로 민족의 미래를 그리며, 피나는 항일투쟁의 길을 마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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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이 수여되었다. 1995년에 ‘역사의 수레를 끌고 밀며-항일독립운동과 백산 지청천 장군’을 저술·발간하였으며, 2007년 운명하였다. 2015년 아들 이준식이 정리한 ‘민들레의 비상’으로 우리에게 다시 그의 빛을 주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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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남[越南]인 묘지에 안장됐으나, 지금은 무덤조차 찾을 수 없게 되었다. 여성 독립운동가 정정화는 조마리아에 대해 “너그러우면서도 대의에 밝은 분이었다”고 회고하였다. 2008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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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왕실 내에서 존경받는 비구니로 활동하였고, 정치적으로도 상당히 수완이 좋았던 것만은 분명하다. 후대의 기록에는 인조반정 이후 이예순이 인목대비의 시주를 받아 동대문 밖 청룡사를 중창하였고, 도봉산 회룡사의 중창불사를 주도하였다고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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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씨는 재산의 절반을 절에 시주할 정도로 평생토록 불사와 신행에 열중하였는데, 이는 유학자 관료들로부터 끊임없이 지탄을 받았다. 하지만 이에 아랑곳없이 평생토록 불교계의 대화주(大化主)를 자처했고, 자신에게 닥친 불행을 보시와 회향(廻向)으로 극복하고자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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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씨의 출가에 이어 태종의 후궁들이 집단적으로 출가를 하고, 세종과 문종, 세조, 성종의 후궁들도 내명부에 적을 두고 있음에도 출가를 한 것은 조선 초 왕실 내의 불교 신앙이 매우 깊었음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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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씨가 다시 왕후로 복권된 것은 그로부터 약 180여 년이 흐른 후였다. 1698년(숙종 24) 노산군이 단종으로 추복(追復)되면서 송씨도 복권되었고, 묘는 사릉(思陵)으로 승격되었다. 그 후 영조는 정순왕후가 살던 인창방의 집터에 왕후를 기리기 위해 정업원구기비(淨業院舊基碑)를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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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원 간섭기 문벌귀족 가문의 여성의 삶을 잘 보여준다. 고려와 원 양국에서 벼슬살이하던 고려의 관리들, 그리고 무려 한 집안에서 수백 명의 노비를 소유했을 정도의 부의 편중, 그리고 무엇보다도 여성의 집안 관리 능력을 인정했던 사회 등 여러 사실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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꼭 동일인인지는 확신할 수 없지만 지공에게서 계를 받을 정도였다면 역시 왕가나 문벌귀족의 딸이 아니면 불가능했을 것이므로, 그녀였을 가능성도 없는 게 아니다. 묘덕은 고려시대 불교문화의 발전에 여성들이 얼마나 큰 기여를 했는가를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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