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32년 5월 15일. 동국(東國)의 계수나무로 자부하였던 고독한 천재 여성시인 오청취당. 그녀는 외아들 김언주(金彦柱)를 낳고 유통(乳痛)을 이기지 못하고 요절하였다. 평소 그토록 동경하였던 신선의 세계로 선인(仙人)이 되어 날아간 것이다.
공동기획: 이투데이, (사)역사 여성 미래, 여성사박물관건립추진협의회
(閨怨類)’, 애정의 결핍과 가난 등 박복한 여인의 한탄과 시름을 읊은 ‘탄식류(歎息類)’는 없다.
일찍이 실학자 이규경(李圭景·1788~1856)은 ‘시가점등(詩家點燈)’에서 이옥재 문학가족의 역사는 “우리나라에 일찍이 없었던 일[鴨東古今未曾有]”이라고 대서특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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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곡은 그녀에 대해 “어려서 과부가 되어 절개를 지키고 늙기에 이르렀는데, 관가에서 구제하여 주지도 않고 사람들도 알아주지 않았으니, 슬프다. 오직 하늘의 이치가 어긋나지 않았으니, 마땅히 그는 건강하여 오래 장수하게 된 것이었다”고 안타까움을 토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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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杏山·박전지의 호)은 망령되이 부인과 더불어 즐거움과 괴로움을 함께하면서 장수하리라 생각하였다”, “행산의 아픈 마음을 어찌 다 말로 할 수 있으리오”라며 애통한 심정을 토로하고 있다. 대령군부인은 정치적 격변기에 남편에게 충고를 아끼지 않았던 관료 부인의 모습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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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져 죽였는데, 김경손은 오승적의 사돈이자 자신과 후계자 경쟁을 했던 김약선의 친동생이었기 때문이다. 이처럼 복수가 대단했던 것은 최이의 후계자 경쟁이 만만한 게임이 아니었음을 시사하는 것이며, 또한 이 과정에서 계모 대씨가 한 역할이 결코 적지 않았음도 동시에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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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는 수많은 번뇌를 낳아 그녀를 불교에 의지하게 했을 것이다. 진각국사비(眞覺國寺碑)에는 그녀가 ‘정화택주 왕도인(王道人)’이라는 이름으로 제자 명단에 포함되어 있다. 이를 통해 그녀가 참선수행을 계속하였고, 최충헌이 죽은 뒤 비구니가 되어 불교에 귀의했을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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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종무열왕의 뒤를 이어 즉위한 문무왕은 문명왕후의 소생이다. 만명부인은 신라의 왕을 사위와 손자로 둔 것이다. 뿐만 아니라 태종무열왕의 딸인 지소부인은 김유신과 혼인하여 며느리가 되었다. 멸망당한 가야 왕족의 후예 가문이 신라 왕실과 친인척 관계를 형성할 정도의 세력가로 부상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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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의 출세를 돕고자 하는 마음에서였을까? 어쩌면 그 여성은 두 처와는 처지가 달라 남편의 제안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는지도 모른다. 이유는 알 길이 없지만, 통일신라시대에 남편과 종신토록 함께 살기 위해서 손님의 잠자리 시중을 들어야 했던 이름도 남기지 못한 한 여성이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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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은 용녀가 왕비가 된 후 나라가 혼란스러워진 틈을 타 신라가 꾀를 내어 침략하려 했다고 한 것에서, 용녀는 혼인동맹을 통해 가야에 온 신라 출신으로, 신라가 혼인을 정략적으로 이용하려 하면서 문제가 됐던 게 아니었을까 추측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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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씨가 의도한 것은 아니었지만, 안장왕을 만나 사랑한 것이 결과적으로는 적국인 고구려의 침입을 유도한 것이다. 고구려에서 보면 한씨는 한강유역을 차지할 수 있게 한 은인이지만, 백제의 입장에서는 적국의 왕을 사랑해 한강유역을 잃게 만든 매국노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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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뒤 형수를 아내로 맞이한다는 의미이지만, 아버지가 죽은 뒤 자식이 친모 외에 아버지의 다른 부인과도 혼인할 수 있었다. 호동이 자신에게 음란한 짓을 하려 한다고 원비가 참소할 수 있었던 것 역시 취수혼을 하는 고구려에서 원비와 호동이 남녀 관계가 될 수도 있는 여지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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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체재 중 한국전쟁이 나자 구호품을 마련해 보내기도 했다. 1952년 귀국해서는 전쟁 중 남편을 잃은 여성들과 고아들을 위해 ‘한미기술학교’를 설립, 이들에게 기술교육을 했다. 1971년 8월 24일, 78세를 일기로 타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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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을 지키기 위한 선택이었다 한다. 허영숙은 한국전쟁 당시 납북되다 지병으로 숨진 전 남편 이광수의 원고를 모두 모아 ‘춘원전집’을 완간하였다. 그 외 별다른 활동 없이 살아가다 1975년 77세의 나이에, 화려했지만 한도 많았을 세상을 등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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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8년 해주에서 개최된 ‘남조선인민대표자대회’에 참석한 후 돌아오지 않고 월북했다. 그 후 1956년 조선평화옹호 전국민족위원회 부위원장, 조선노동당 중앙위원 후보, 1957년 조선민주여성동맹 부위원장으로 이름을 올렸으나, 1958년 이후 행적이 끊겼다. 숙청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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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의 학교는 식민지 당국의 압력 속에 무궁화를 상징하던 ‘근화’라는 이름과 결별, 1938년 10월 ‘덕성여자실업학교’로 이름을 바꾸었다. 그녀는 결국 1940년 8월 교장 직위에서 물러나 교육 일선에서 손을 떼었다. 재단 이사장으로서 학교를 지키다 1955년 6월 1일 77세로 생을 마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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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등에 기반한 현모양처, 그것은 천역이 아니라 사회에 대한 부인의 사명이라는 주장을 한다. 그 후 이일정이란 세 글자가 다시 신문지상에 나타난 것은 1935년 5월 15일자 ‘동아일보’이다. 5월 13일 딸 종숙의 집에서 숙환인 심장병으로 그녀의 파란만장한 삶을 마감하였다는 소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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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에서 독립운동하는 사람 치고 그녀의 신세를 지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는 소문까지 나돌았다고 하니 말이다. 그녀의 소식은 해방 되던 해 동생 윤창한(尹昌漢)에게 보내온 서찰을 마지막으로 끊겼다. 무엇이 그녀로 하여금 끝까지 고향 산천을 등지게 하였는지… 자못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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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희는 17세에 첫째 딸 희정을 낳고, 20세에 둘째 딸을 낳았다. 흥미로운 사실은 둘째 딸을 낳을 때까지 한 번도 시댁을 방문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당시는 신랑이 장인 집에 들어와 사는 입장가(入丈家) 시절이라 이런 것들이 크게 문제가 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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