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세 때 충남 서산시 음암면 유계리 경주김씨 김한량(金漢良·1700~1752)과 혼인하여 29세에 요절하기까지 서산의 여성으로 살았다. 청취당의 7년 동안의 혼인생활은 182수의 한시로 남아 ‘청취당집(淸翠堂集)’으로 엮였다. ‘청취당집’은 1803년에 외손 박종규(朴宗圭)에 의해 편찬되었는데, 청취당 사후 70여 년 만의 일이다.
청취당의 남편 김한량은 관직에 나아가기를...
이옥재(李玉齋·1643~1690)는 우리나라 고전문학사상 유일하게 부부 시집을 남긴 여성 문인이다. 남편은 김성달(金盛達·1642~1696), 부부시집 제목은 ‘안동세고(安東世稿)’이다. 이옥재는 조선 중기 명문장가 월사 이정구(1564~1635)의 증손녀로 교육받고 자라나, 병자호란 당시의 충절지사 선원 김상용(1561~1637)의 증손부로 살아가면서, 두 가문의 위상과 정신사에...
김임벽당(金林碧堂·1492~1549)은 조선전기 3대 여성시인이다. 시(詩)·서(書)·자수(刺繡) 삼절(三絶)로 이름을 떨친 예술인이다. 임벽당은 충남 부여에서 아버지 의성 김씨 김수천(金壽千)과 어머니 한양 조씨의 딸로 태어났다. 남편은 기계 유씨 유여주(兪汝舟)인데, 남편이 기묘사화(1519)에 연루되자 충남 서천군 비인면 남당리로 낙향하여 평생을 은거하며 살다가...
그러나 기본적으로 고려 왕조는 여성에게 수절을 강요하지 않았다. 수절은 남편이 죽어도 그에 대한 정절을 계속하여 다른 데 시집가지 않는 것이다. 이게 소위 ‘삼종지도(三從之道)’, ‘일부종사(一夫從死)’ 이데올로기인데, 이는 유교에서 강조하는 것이다. 고려시대에는 불교가 기본적인 사회 윤리였고, 불교에서는 남편 사후까지 정절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杏山·박전지의 호)은 망령되이 부인과 더불어 즐거움과 괴로움을 함께하면서 장수하리라 생각하였다”, “행산의 아픈 마음을 어찌 다 말로 할 수 있으리오”라며 애통한 심정을 토로하고 있다. 대령군부인은 정치적 격변기에 남편에게 충고를 아끼지 않았던 관료 부인의 모습을 보여준다.
공동기획: 이투데이, (사)역사 여성 미래, 여성사박물관건립추진협의회
던져 죽였는데, 김경손은 오승적의 사돈이자 자신과 후계자 경쟁을 했던 김약선의 친동생이었기 때문이다. 이처럼 복수가 대단했던 것은 최이의 후계자 경쟁이 만만한 게임이 아니었음을 시사하는 것이며, 또한 이 과정에서 계모 대씨가 한 역할이 결코 적지 않았음도 동시에 보여주고 있다.
공동기획: 이투데이, (사)역사 여성 미래, 여성사박물관건립추진협의회
이는 수많은 번뇌를 낳아 그녀를 불교에 의지하게 했을 것이다. 진각국사비(眞覺國寺碑)에는 그녀가 ‘정화택주 왕도인(王道人)’이라는 이름으로 제자 명단에 포함되어 있다. 이를 통해 그녀가 참선수행을 계속하였고, 최충헌이 죽은 뒤 비구니가 되어 불교에 귀의했을 것으로 보인다.
공동기획: 이투데이, (사)역사 여성 미래, 여성사박물관건립추진협의회
태종무열왕의 뒤를 이어 즉위한 문무왕은 문명왕후의 소생이다. 만명부인은 신라의 왕을 사위와 손자로 둔 것이다. 뿐만 아니라 태종무열왕의 딸인 지소부인은 김유신과 혼인하여 며느리가 되었다. 멸망당한 가야 왕족의 후예 가문이 신라 왕실과 친인척 관계를 형성할 정도의 세력가로 부상한 것이다.
공동기획: 이투데이, (사)역사 여성 미래, 여성사박물관건립추진협의회
안길(安吉)의 처는 통일신라시대 여성으로 성씨도 이름도 남아 있지 않다. 남편의 이름은 안길이지만 안길의 처라고 부르는 것도 정확한 것은 아니다. 안길에게는 여러 명의 처첩(妻妾)이 있었고 그중 한 명에 불과하다. 엄격하게 처(妻)였는지 첩(妾)이었는지도 정확하지 않다.
남편인 안길은 무진주(武珍州·오늘날 광주(光州) 일대)의 관리였다. 어느 날 무진주에 스님...
대부분의 고대 여성은 어머니로서 혹은 누구의 부인이나 딸이라는 계보상의 존재로 등장한다. 그런데 용녀는 우리나라 문헌 자료에 기록된 첫 유배 사례의 주인공으로 나타난다. ‘삼국유사’에서는 용녀가 유배를 가야 할 정도로 어떠한 정치적 행동을 했는지에 대해서는 나오지 않는다. 다만 용녀를 왕비로 삼고 그 무리들에게 벼슬을 주자 나라가 소란스러웠다고 하는...
한씨가 의도한 것은 아니었지만, 안장왕을 만나 사랑한 것이 결과적으로는 적국인 고구려의 침입을 유도한 것이다. 고구려에서 보면 한씨는 한강유역을 차지할 수 있게 한 은인이지만, 백제의 입장에서는 적국의 왕을 사랑해 한강유역을 잃게 만든 매국노인 것이다.
공동기획: 이투데이, (사)역사 여성 미래, 여성사박물관건립추진협의회
죽은 뒤 형수를 아내로 맞이한다는 의미이지만, 아버지가 죽은 뒤 자식이 친모 외에 아버지의 다른 부인과도 혼인할 수 있었다. 호동이 자신에게 음란한 짓을 하려 한다고 원비가 참소할 수 있었던 것 역시 취수혼을 하는 고구려에서 원비와 호동이 남녀 관계가 될 수도 있는 여지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공동기획: 이투데이, (사)역사 여성 미래, 여성사박물관건립추진협의회
김마리아 등 지식인 여성들이 국내외를 망라하여 만든 항일 여성단체였다. 활동 두 달 만에 간부 전원이 체포되고, 황애덕 또한 3년간 대구형무소에 수감된다. 운동의 전환기가 되는 이 옥살이에서, 그녀는 그동안 자신이 해온 활동이 소수 엘리트 중심이었다는 성찰과 여성 대중에 대한 계몽의 필요성을 절감했다. 그녀가 감방에서 여성 죄수들에게 한글과 성경을...
그렇지만 그녀 또한 기자로서, 의사로서, 그리고 주부로서 자신의 길을 개척하고, 장안의 대표 신여성들과 함께 어깨를 견주며 한 축의 식민지 여성 담론을 생산하기도 한 인물이었다.
허영숙은 1897년 서울의 부유한 상인 허종의 막내딸로 태어났다. 진명여학교와 경성여자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한 후 도쿄여자의학전문학교에 들어간다. 도쿄에서 이광수를 만나, 그의...
정칠성(1897~1958)은 사회주의 여성운동가이다. 기생에서 사회운동가로 변신하였다고 하여 소위 ‘사상기생(思想妓生)’이라 불리기도 했다. 무산여성의 계급해방을 위한 투쟁에 평생을 바친 혁명가이다.
1897년 대구에서 태어난 그녀는 8세라는 어린 나이에 기생이 되었다. 기명은 금죽(琴竹)이다. 경성 대정권번(大正券番) 소속의 기생이었던 그녀 인생의 전환점은 3...
차미리사(1878~1955)는 여성교육 계몽운동가이자 교육자이다. 덕성학원의 전신인 근화학원을 세워 빈곤한 여성들을 위한 교육에 헌신하였다. 식민지 시기 문맹퇴치를 위한 전국 순회 공연은 그녀가 얼마나 정력적으로 여성들의 교육 계몽에 힘썼는지를 드러낸다.
차미리사는 1878년 8월 22일 경기도 용강면 공덕리에서 태어났다. 6남매 중 막내로 태어난 그녀의 어릴...
여성도 독자적인 생활 기반을 닦아야만 한다는 평소의 지론대로, 1907년 2월 안국동에 간판을 내걸고 살림살이에 필요한 일용 잡화를 판매하였다. 1928년 ‘별건곤’ 12월호는 부인상점의 원조로 그녀와 그녀의 ‘일정상회(一貞商會)’를 소개하였다. 이 잡화점은 불과 2년 만에 문을 닫았는데, 그녀가 헤이그에서 사망한 남편의 유해라도 찾겠다고 해외를 떠돈 것이...
한성고등여학교 교사가 되어 여성 교육과 그 계몽에 힘쓴 인물이다.
대한자강회 회장을 지낸 운정(雲庭) 윤효정(尹孝定)의 장녀로 1883년 서울 창신동에서 태어났다. 아호는 남휘(藍輝)이다. 아버지 윤효정이 사제 관계를 맺고 아들처럼 아낀 일본 유학생 최석하(崔錫夏)와 1909년 결혼하여 그 이듬해 아들 량(亮)을 낳았다.
그녀의 유학 생활은 1898년 ‘고종양위사건’에...
사실 숙희가 인물사전에 등재될 정도의 뛰어난 여성이 될지는 의문이다. 하지만 우리는 숙희의 출생과 교육, 성장 과정을 통해 성리학이 보편화하는 16세기 양반 사대부 집안 딸들의 성장 과정을 파악할 수 있다. 유희춘(柳希春·1513∼1577)의 외손녀 은우(恩遇)와 이문건의 친손녀 숙희가 여기에 해당된다고 하겠다.
숙희는 배움에 대한 집념이 강하고, 자신이 익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