엇박에 AI생태계 추진력 약화
정치권 극한 대립 정책 논의 차질

산업계는 GPU와 데이터센터 확충에 속도를 내고 있으나 입법·전력 인프라·정치 거버넌스가 이를 따라가지 못하면서 국가 AI 전략의 추진력이 약화하고 있다는 지적이다. 전문가들은 “AI 경쟁의 본질은 기술이 아니라 실행 시스템”이라며 “법·인프라·정치가 맞물리지 않으면 산업 생태계 전체가 공회전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이규복 한국전자기술연구원 석좌연구위원은 “정부가 AI 고속도로를 구축해 기업뿐 아니라 공공 부문에서도 활용할 수 있도록 하는 목표를 세웠지만 법적 기반이 마련되지 않아 정책 논의가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GPU 26만장 지원은 상징성과 기대효과가 크지만 법안이라는 기초가 세워지지 않으면 어떻게 쓸지 논의할 수 없다. 즉, 진도가 안 나가는 숙제 보따리를 못 풀고 떠안는 상태”라며 “산업 도메인별로 AI를 빨리 적용시켜 우리나라에 맞는 플랫폼을 만들어야 한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연구소에서는 (법안이 통과되기를) 그저 기다릴 뿐”이라며 “정부가 AI 관련 정책을 실행하려면 법안이 먼저 통과돼야 하고 AI 관련해서는 여야가 싸울 것이 아니라 국가의 미래를 위해 빨리 협의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법적 기반 미비에 더해 기술 변화 속도를 따라가지 못하는 제도적 대응도 산업 전반의 또 다른 제약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최병호 고려대 AI연구소 교수는 “AI 기술은 워낙 빠르게 진화하기 때문에 법이 만들어지더라도 지속적으로 업데이트할 체계가 필요하다”며 “국가 안보, 산업 시스템, AX(인공지능 전환) 등 국민 생활과 직결된 영역에 대해서는 입법 속도와 타이밍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말했다.
최 교수는 충분한 논의 없이 밀어붙이는 ‘졸속 입법’이 아니라 변화의 속도를 이해한 상태에서 합리적인 토론 구조를 마련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특히 GPU를 활용할 데이터센터와 전력망 확충은 사회적 합의가 필요한 과제이지만 이를 늦출 경우 글로벌 경쟁에서 뒤처질 수 있다고 경고했다.
그러면서 “GPU를 어떻게 배분하고 어떤 규모의 예산으로 집행할 것인지에 대한 법안과 정책 논의를 서둘러야 한다”며 “특히 학계에는 5만 장 수준의 GPU가 조기 집행돼야 연구 현장이 숨통을 틀 수 있다”고 강조했다. 이 같은 인프라 확보는 단순한 장비 문제가 아니라 인재 유치와 육성과 같은 연구 경쟁력의 선순환 구조와 직결된다는 설명이다.
하지만 산업계의 속도와 달리 정치권의 움직임은 여전히 제자리다. AI 인프라를 뒷받침할 법안이 국회 문턱을 넘지 못하면서 입법 교착이 산업 경쟁력의 가장 큰 불확실성으로 떠올랐다.
정치권 갈등으로 산업계의 정책 불확실성이 커지는 가운데 전문가들은 “현 국회의 구조로는 합의에 기반한 법안 처리가 사실상 불가능하다”며 “책임정치 체제로의 전환이 해법이 될 수 있다”고 진단했다.
엄기홍 경북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본지 통화에서 “지금 국회는 전형적인 ‘단점(單占) 정부’ 구조”라며 “여당(민주당)이 국회 다수를 확보한 만큼, 마음만 먹으면 법안을 통과시키는 것은 구조적으로 가능하다”고 말했다.
그는 “문제는 국회가 관행적으로 ‘합의의 정치’를 고수하고 있다는 점”이라며 “법사위를 야당에 배분하는 방식 등은 과거 정치문화를 답습하는 것일 뿐, 현 상황에서는 오히려 발목을 잡는 제도”라고 지적했다.
엄 교수는 특히 “양극화가 격화된 현 정국에서는 민생 법안조차 ‘배신 프레임’에 갇혀 야당이 동의해 주기 어렵다”며 “현실적으로 합의 처리가 불가능한 만큼 다수당이 책임을 지고 필요한 법안을 처리하고 이후 선거에서 평가받아야 한다”고 밝혔다.
신율 명지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역시 “현 정국에서 여야의 ‘정책 협의’는 사실상 기대하기 어렵다”며 “상대 당을 절대악으로 규정하는 단계까지 왔기 때문에 타협 자체가 구조적으로 어려운 상태”라고 진단했다.
신 교수는 반도체·에너지 법안 처리 방안에 대해 “법안을 쪼개든 통으로 가든, 방식 자체가 핵심은 아니다”라며 “문제는 여야가 상대를 인정하지 않는 정치 환경이며 이 상태에서는 어떤 절충도 성립하기 어렵다”고 강조했다.
이어 “반도체 인력난, 탄소중립 목표 조정 같은 산업계 현실은 매우 무겁고 시급한 사안이지만 정치권의 극한 대립 속에서 정책 논의가 이뤄지기 어려운 구조”라며 “국회가 스스로 구조를 바꾸거나 책임을 분명히 하는 방식으로 접근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