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죄의 실행·준비행위를 통해 형성된 위탁관계는 횡령죄로 보호할 수 없다는 대법원 첫 판단이 나왔다.
대법원 3부(주심 김재형 대법관)는 횡령 혐의로 기소된 A 씨 상고심에서 징역 6개월을 선고한 원심을 깨고 사건을 부산지법으로 돌려보냈다고 20일 밝혔다.
의료인이 아닌 A 씨는 의료기관을 개설할 자격이 없는데도 2013년 마찬가지로 의료인이 아닌 피해자 B, C 씨와 의료소비자생활협동조합을 설립해 조합 명의로 요양병원을 운영, 수익을 나눠 갖기로 했다.
약정에 따라 B 씨로부터 2억2000만 원, C 씨로부터 3000만 원을 투자금 명목으로 받아 보관하던 중 2014년경 2억3000만 원을 두 사람의 동의 없이 개인채무 변제에 사용해 기소됐다.
재판에서는 A 씨를 횡령죄로 처벌할 수 있는지가 쟁점이 됐다. 횡령죄가 성립하려면 A 씨와 피해자 사이에 해당 돈에 관한 ‘형법상 보호 가치 있는 위탁관계’가 인정돼, A 씨에게 ‘피해자 소유의 돈을 보관하는 자’로서의 지위가 인정돼야 한다.
그런데 A 씨는 ‘의료법상 처벌 대상이 되는 계약’에 따라 피해자들로부터 돈을 받았다. 이때 이들 사이에 ‘형법상 보호 가치가 있는 위탁관계’가 인정되는지가 판단 대상이 됐다.
1심은 A 씨의 혐의를 유죄로 인정해 징역 1년을 선고했고, 2심은 일부 혐의를 면소 판단해 징역 6개월을 선고했다.
2심은 A 씨와 피해자들 간의 동업약정은 강행법규인 의료법을 위반해 무효지만, 반사회질서행위로서의 불법원인급여는 아니라고 봤다. 이에 따라 C 씨는 A 씨에 대해 민사상 반환청구권을 갖고, 이 상태에서 A 씨가 피해자들의 돈을 개인적으로 사용한 것은 횡령죄로 처벌할 수 있다는 취지다. 다만 B 씨와 관련된 부분은 이미 사기죄로 기소돼 무죄 판단을 받은 바 있어 면소 판결했다.
그러나 대법원은 “재물의 위탁행위가 범죄의 실행행위나 준비행위 등과 같이 범죄 실현의 수단으로서 이뤄진 경우 그 행위를 통해 형성된 위탁관계는 횡령죄로 보호할 만한 가치 있는 신임에 의한 것이 아니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판단했다.
피해자가 민사상 반환청구도 할 수 없는 불법원인급여가 되는 것은 아니지만, 민사상 반환청구권이 허용된다고 무조건 형사상 보호 가치가 있는 위탁관계에 해당하는 것도 아니라고 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