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병준의 말] 아비를 아비라 할 수 없게 만들어서야

입력 2016-05-17 10: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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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부모 밑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다. 배울 만큼 배우고 직장을 잡고 결혼을 할 때까지 부모와 같이 살기도 한다. 당연히 부모의 영향을 많이 받는다.

돈 있고 힘 있는 ‘잘난’ 부모 밑에서 잘난 자식이 나온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힘없고 돈 없는 부모 아래에서 못난 자식이 나온다는 말도 아니고, 부모가 없으면 잘못 자란다는 말은 더욱 아니다.

이런 것, 즉 돈이나 힘이 있고 없고와 관계없이 자식들은 부모로부터 많은 것을 얻고 배운다. ‘있는 것’을 무엇을 위해 어떻게 쓰느냐를 보며 배우고, ‘없는’ 형편을 어떤 자세로 살아가는가를 보며 배운다. 또 부모와의 관계가 어떠했느냐가 자식의 가치관과 인생관을 결정하기도 한다.

부모와 자식의 관계가 이런데도 로스쿨, 즉 법학전문대학원 지원자의 자기소개서에 부모의 직업이나 사회경제적 지위를 암시하는 말을 쓰지 못하게 한단다. 그러고도 ‘자기’를 제대로 소개할 수 있을까?

검사 판사 변호사가 될 청년들에게 제일 먼저 요구하는 것이 사실을 사실대로 말하지 말라는 것이라니…. 참으로 기가 막힌다. 로스쿨에 들어가기도 전에 감추고 왜곡하는 것부터 해야만 하는 이 현실이 참담하기만 하다. 이런 자기소개서는 왜 쓰게 하며, 이런 로스쿨은 왜 있어야 하나?

이해하지 못하는 바 아니다. 부모의 직업이나 영향력을 보고 학생을 선발하는 일이 있으니 이러는 것 아니겠나. 사회정의의 원천이 되어야 할 로스쿨이 부당한 차별과 특혜의 온상이 되어가니 이러는 것 아니겠나. 그것도 도를 넘어서 말이다.

부끄럽다. 금수저 흙수저 논란에 멍든 청년들을 볼 낯이 없다. 또 현대판 ‘음서제’ 운운하는 상황에 쥐구멍에라도 들어가고 싶다. 어쨌든 학교에서 학생을 가르치고, 또 이 제도가 만들어지는 것을 유심히 지켜본 사람으로서 말이다.

하지만 이게 어디 로스쿨만의 문제인가. 냉정히 생각해 보자. 로스쿨은 왜 사회적 지위가 있는 사람들의 자식을 선호할까? 그들의 자식이 더 똑똑하고 현명해서? 선발을 하는 교수들이 동종의식이나 동류의식을 느껴서? 아니면 그들의 부모로부터 청탁이나 압력을 받아서?

그럴 수 있다. 하지만 분명 그것만은 아니다. 그 뒤에는 잘못된 사법문화와 어지러운 법조시장이 있다. 즉 정의롭지 못한 수사와 기소 그리고 재판이 있다는 말이다. 이번의 ‘정운호 사건’만 해도 그렇다. 단순히 전관예우의 문제가 아니다. 돈의 문제도 함께 걸려 있다. 수십 억 원 단위의 수임료가 오로지 변호사에게만 가게 되어 있었겠나?

결국 인간관계와 돈이 수사와 기소, 그리고 판결에 영향을 미친다는 이야기다. 아니면 최소한 그렇게 믿게 만드는 상황이라는 뜻이다. 바로 이러한 현실과 믿음 위에 법조시장이 춤을 추는 것이고.

어떤 춤을 추느냐고? 자, 여러분이 법무법인의 임원으로 신임 변호사를 선발한다고 하자. 법원과 검찰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부모를 가진 변호사와 그렇지 못한 변호사, 어느 쪽을 선택하겠나? 또 큰 의뢰인을 소개할 수 있는 부모를 가진 변호사와 그렇지 못한 변호사 중에서는? 묻고 답할 이유가 없다.

로스쿨 교수들은 어떨까? 취업이 잘될 수 있는 조건을 갖춘 지원자를 선택할까? 그렇지 못한 지원자를 선택할까? 더욱이 이토록 취업이 어려운 상황에서 말이다.

문제는 자기소개서가 아니다. 공정하지 못한 사법제도와 법조문화다. 그런데 이를 고쳐나가야 할 검찰과 법원은 왜 말이 없나? 로스쿨 입학의 금수저 흙수저 문제가 왜 자기소개서 문제에 멈춰 있어야 하나? 그리하여 법조인이 되어야 할 이 나라의 청년들에게 사실을 사실로 이야기하지 않는 것부터 배우게 하나?

우선 당장에는 그렇게라도 해야 한다고 하자. 그러나 검찰과 법원은 이 문제로부터 숨어서는 안 된다. 모든 문제는 바로 법원과 검찰, 그곳에서 출발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야말로 뼈를 깎는 개혁을 해라. 그리하여 법조인이 되겠다는 이 땅의 젊은이들이 법률적 지식과 법조인으로서의 잠재성만으로 선택받게 만들어라. 아비를 아비라, 어미를 어미라 말할 수 없게 만들어서야 되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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