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9년 여성 최초로 서울대 법대를 나온 이태영은 1952년 고등고시에 합격해 최초의 여성 변호사가 되었다.
이태영이 변호사가 될 무렵, 새로운 가족법(민법의 친족·상속편)을 제정하는 작업이 진행되고 있었다. 광복 후 미군정은 창씨제도를 비롯해 일제의 악법을 폐지했지만, 민법은 새로운 법을 제정할 때까지 법적 효력을 유지시켰다. 이에 새로운 민법이...
어린 최경자가 가장 선망했던 대상은 외국 선교사와 대도시에서 유학하는 선배 여성들이었다. 드레스를 입은 선교사와 뾰족구두를 신은 여학생에 매료되어 자신도 ‘신여성’이 되고 싶었다.
1927년 루씨여자고등보통학교에 입학했으며 졸업한 뒤에는 꿈에 그리던 유학길에 올랐다. 1932년 도쿄 국립 무사시노(武藏野) 음악학교 사범과에 입학해 피아노를 배우다가...
공덕귀는 다시 야당 정치인이 된 남편을 돕는 한편, 한국 사회 민주화 운동과 여성 인권 운동에 적극 나섰다. 1974년 민청학련(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 사건으로 윤보선이 실형을 선고받은 뒤 구속자가족협의회 회장을 맡았으며, 1976년에는 ‘3·1사건 가족대책협의회’ 회장으로 남편의 석방운동을 했다. 1977년에는 한국교회여성연합회 회장이 되어 여성노동자들의...
광복 후 조선여자국민당(대한여자국민당)을 만들어 우익계 여성운동을 주도했다. 1948년 대한민국 정부의 초대 상공부 장관이 되었다. 결혼한 여성은 금치산자처럼 취급되어 남편의 허락 없이 독립적으로 법률 행위를 할 수 없었던 시대였다. 여성이 초대 내각의 장관이 될 수 있었던 것은 대통령 이승만의 지원을 빼놓고서 설명하기 어렵다. 그러나 얼마 되지 않아...
사실 향복이 인물 란에 오를 만한가 의구심을 가질 수 있다. 그러나 요즘에는 보통사람의 삶의 모습을 찾아내는 것도 역사를 이해하는 중요한 방식으로 등장했으며, 자료가 다양해지면서 하층민의 일생에 대한 조망도 가능해졌다. 아마 그 대표적인 사례가 향복이 될 수 있다. 사실 우리는 이들 하층민의 삶에 대해 거의 아는 것이 없지 않은가?
향복의 어미는 이문건...
그녀는 성주에 유배 중인 이문건이 아끼던 정인(情人)이었으나 부인의 심한 투기로 인해 결국 황참군(黃參軍)이란 인물과 머리는 올리게 된다. 일반적으로 기녀는 경기(京妓)와 관기(官妓)로 구분하는데, 경기는 장악원에 소속된 예기이며, 관기는 지방 군현에 속한 기녀이다.
비(婢) 중에서 뽑는 기녀의 기준은 자색(姿色)과 재예(才藝)였다. 즉, 얼마나 예쁘고 예술적인...
기년설이 채택되어 서인 정권이 몰락하고 남인 정권이 성립하게 된다. 장렬왕후는 1688년(숙종 14) 64세를 일기로 창경궁 내반원에서 사망했다.
시호는 자의공신휘헌강인정숙온혜장렬(慈懿恭愼徽獻康仁貞肅溫惠莊烈)이다. 능호는 휘릉(徽陵)으로 경기도 구리시 동구릉에 있다.
공동기획: 이투데이, (사)역사 여성 미래, 여성사박물관건립추진협의회
1555(명종 10)∼1600년(선조 33). 조선 제14대 선조의 왕비이다. 성은 박씨이고, 본관은 나주이다. 아버지는 번성부원군 박응순(朴應順)이며, 어머니는 전주 이씨 이수갑(李壽甲)의 딸이다. 박응순은 인성왕후와 10촌 관계이다. 슬하에 자녀는 없다.
15세가 되던 1569년(선조 2) 12월 왕비에 책봉되어 가례를 행했다. 몸이 허약해서 오랫동안 앓는 바람에 결국 아이를 낳지...
가장 먼저 을사사화(乙巳士禍)에 화를 입은 인물들을 신원하여 복직시켰다. 1549년(명종 4) 기유옥사(己酉獄事)로 유신현(維新縣)으로 강등되었던 충주를 다시 목(牧)으로 올렸다.
또한 인순왕후는 명종 대에 환관이 왕실 및 척신세력과 연계하여 일정한 폐해를 일으켰다는 판단에서 환관의 수를 절반으로 줄였다. 오례의(五禮儀)의 정비에 따라 상복의 경우 흑립...
무비와 가장 가까운 인물은 환관 백선연이었다. 백선연은 남경의 관노 출신으로 의종이 남경에 갔을 때 보고 데려와 ‘양자(養子)’라 부르며 총애했다. 같은 남경 출신에 신분도 같았으니 드넓은 궁에서 둘 간의 애착과 연대감은 남달랐을 것이다. 이 때문에 둘이 간통을 한다는 소문도 났다. 관리 문극겸은 이들이 추잡한 행동을 하고 술사(術士) 영의와 미신으로 왕을...
태후는 인주 이씨가 독식하던 왕비 자리에 새로운 인물로 간택되었다. 5남4녀의 자식을 낳았으며, 이 중 세 명이 왕이 되었고, 그녀는 태후가 되었다. 왕비 책봉문에 의하면 그녀는 ‘덕망 높은 가문에서 출생하여 모든 행동에 반드시 예절을 지켰다’고 되어 있다. 그녀 역시 당시대가 요구하던 도덕에 충실했던 여성이었다 하겠다.
공동기획: 이투데이, (사)역사...
폐비 자매는 정치적 이유로 조카와 혼인해야 했고, 또 아비가 남편을 죽이려는 모의에도 가담해야 했다. 이후에는 조정 신하들에 의해 강제로 이혼당하기도 하였다. 여성으로서의 인생은 불행했다 하겠지만, 자신의 의지로 ‘의리’를 선택하며 살았다 하겠다.
공동기획: 이투데이, (사)역사 여성 미래, 여성사박물관건립추진협의회
정신현비는 인주 이씨 이예의 딸이니 예종은 첫 번째 왕비부터 인주 이씨 집안의 여성을 들인 셈이다. 왜 경화왕후를 택했는가? 고려 전기 왕들의 경우 왕비 중 최소한 1명은 공주들 중에서 맞이했는데, 아버지 숙종의 형제로 순종과 선종이 있다. 순종은 자식이 없었고 선종에게는 딸이 셋 있었는데, 경화왕후가 장녀이고, 둘째딸은 일찍 죽었으며, 셋째 딸은 태어날...
묘지명이란 죽은 이의 일대기를 돌 같은 데 써서 무덤 속에 함께 묻은 것으로, 고려시대 여성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유씨 부인의 본관은 정주(황해북도 개풍군)이며 아버지는 유홍, 어머니는 경주 김씨 김원황의 딸이다. 언니는 숙종의 왕비인 명의왕태후이다. 군군(郡君)이란 귀족부인들에게 주어지는 벼슬(외명부) 칭호이며, 그녀의 본관 정주의 별칭인...
이를 통해 부모에 대한 효를 우선시하는 신라인의 사고를 엿볼 수 있다. 또한 지극한 효(孝)는 현세에서는 구체적으로 왕의 포상, 내세에서는 최종적으로 불교로 귀의라는 선(善)에 도달한다는 관념도 가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공동기획: 이투데이, (사)역사 여성 미래, 여성사박물관건립추진협의회
수로부인(水路夫人)은 신라 제33대 성덕왕(聖德王, 재위 702∼737년) 대의 인물로, 순정공(純貞公)의 부인이다. 수로부인은 2수의 향가(鄕歌), ‘해가(海歌)’와 ‘헌화가(獻花歌)’의 주인공이다. 우선 ‘헌화가’와 관련된 일화를 보자. 순정공이 강릉태수로 부임하러 가던 길이었다. 도중에 바다를 바위 봉우리가 병풍과 같이 둘러친 바닷가에서 점심을 먹던 참이었다. 이때...
이것이 혜명왕후와 그의 일족들에게 위기감을 주었던 것이다.
효성왕은 후사가 없이 죽었다. 효성왕의 동생인 경덕왕이 즉위하였고, 혜명왕후는 태후가 되었다. 혜명왕후는 신라 왕실에서 ‘왕후’의 지위를 적극적으로 쟁취하고, 지켜내는 모습을 생생하게 보여주는 인물이다.
공동기획: 이투데이, (사)역사 여성 미래, 여성사박물관건립추진협의회
6세기의 신라에서는 왕실 여성의 위상이 높았음을 알 수 있다.
신라에 불교가 처음 전래될 당시에 불교를 공인하고, 살생을 금지하고, 흥륜사를 창건한 법흥왕만이 주목되었다. 그런데 법흥왕비인 보도부인 역시 법명을 받고 출가하였고, 영흥사를 지어서 그곳에 머물렀다. 법흥왕비는 자신이 출가하여 영흥사에 머물렀던 이유에 대해 법흥왕의 뜻이 아닌 신라 최초의...
신의경(辛義敬, 1897∼1988)은 한국 역사상 최초의 여성 국회의원 4인 중 한 사람이다. 1898년 3월 23일 서울에서 아버지 신정우와 어머니 신마리아(본명 김마리아)의 3남 1녀 중 고명딸로 태어났다. 집안은 기독교 가정이었고 어머니는 정신여학교(貞信女學校) 교감, 연동교회 최초의 집사, 초대 여전도회 회장으로 활동했다. 한국 최초의 여의사 박에스터(김점동)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