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왕실 내에서 내명부 직첩을 가진 인물 가운데 최초로 비구니가 된 인물이기도 하다. 생몰년은 미상이다.
권씨는 1402년(태종 2) 태종의 후궁 중에서도 처음으로 정식 절차를 거쳐 후궁으로 봉해졌다. 태종은 애초에 권씨와 가례(嘉禮)를 거행하려 하였으나 원경왕후의 반대로 예식은 무산되었다. 권씨는 후궁이 된 직후 정의궁주(貞懿宮主)로 봉해졌다가 1422년(세종 4)...
단종비 정순왕후 송씨(定順王后 宋氏·1440~1521)는 조선의 왕비 가운데 유일하게 비구니가 된 인물이다. 1440년(세종 22) 판돈녕부사 송현수의 딸로 태어난 송씨는 1454년(단종 2) 왕비에 책봉되었다. 왕비로 책봉된 이듬해에 단종은 세조에게 양위했고 곧이어 사육신의 단종복위 사건으로 단종이 영월에 유배되면서 송씨는 노산군(魯山君) 부인으로 강등되었다.
송씨는...
그녀는 원 간섭기 문벌귀족 가문의 여성의 삶을 잘 보여준다. 고려와 원 양국에서 벼슬살이하던 고려의 관리들, 그리고 무려 한 집안에서 수백 명의 노비를 소유했을 정도의 부의 편중, 그리고 무엇보다도 여성의 집안 관리 능력을 인정했던 사회 등 여러 사실을 알 수 있다.
공동기획: 이투데이, (사)역사 여성 미래, 여성사박물관건립추진협의회
꼭 동일인인지는 확신할 수 없지만 지공에게서 계를 받을 정도였다면 역시 왕가나 문벌귀족의 딸이 아니면 불가능했을 것이므로, 그녀였을 가능성도 없는 게 아니다. 묘덕은 고려시대 불교문화의 발전에 여성들이 얼마나 큰 기여를 했는가를 보여준다.
공동기획: 이투데이, (사)역사 여성 미래, 여성사박물관건립추진협의회
그런데 여기서 주목하고 싶은 것은 그녀와 남편이 다시 부부로 살았다는 점이다. 병자호란 때의 환향녀(還鄕女)들이 단지 포로로 잡혀갔다 돌아왔다는 이유만으로 이혼을 당했음을 생각해 보라! 여기서도 조선과 다른 고려의 성 관념이 보인다.
공동기획: 이투데이, (사)역사 여성 미래, 여성사박물관건립추진협의회
진씨가 산 시대는 무신 집권기와 몽골의 침입 등으로 매우 어수선했다. 또 술 좋아하고, 출세가 늦은 남편 때문에 몸과 마음이 몹시 고생스럽기도 하였다. 그녀의 삶은 무신 집권기 중하급 관료 부인의 삶을 잘 보여준다.
공동기획: 이투데이, (사)역사 여성 미래, 여성사박물관건립추진협의회
아엄(兒奄)은 삼국시대를 살았던 6세기 여성이다. 고구려, 백제, 신라 삼국이 한반도의 패권을 치열하게 다투던 시기였다. 삼국은 특히 한강을 차지하기 위해 치열하게 접전을 벌였는데, 남한강 유역인 오늘날의 충주지역은 처음에는 백제가 차지했으나 고구려로 넘어갔다가 다시 신라로 주인이 바뀌는 등 격전지였다.
이 충주지역에서 12.4㎝ 크기의 광배(光背)가 있는...
‘삼국유사’의 편자인 일연스님은 분황사에 모셔진 천수관음의 영험담을 이야기하고자 한 것이겠지만, 여기서는 불치병의 자식을 위해서 기도밖에는 할 수 없었던, 자식이 광명을 찾게 되기를 간절히 바랐던 그 ‘희명’의 마음이 이름처럼 전해오는, 가진 것도 기댈 곳도 없었던 통일신라시대 여성의 절절했던 모정을 주목하고자 한다.
공동기획: 이투데이, (사)역사...
단의장옹주가 교류하고 후원하였던 지증과 수철은 신라 하대 구산선문(九山禪門)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던 인물이다. 지증은 희양산문(曦陽山門)의 개조(開祖)로 알려져 있으며, 수철은 실상산문(實相山門)의 2대조이다. 신라 하대 구산선문 가운데 두 선문이 단의장옹주의 후원으로 성장하였음을 알 수 있다. 단의장옹주는 일찍이 혼자가 되었지만 절망하지 않고...
천명부인이 두 집안의 가교 역할을 한 것이다. 묵묵히 자신의 삶을 살았던 천명부인은 아들 김춘추가 왕위에 오른 뒤 문정태후(文貞太后)에 추존되었다. 다른 자매들이 왕과 왕비가 되었다면, 천명부인은 왕모(王母)로서의 지위를 누린 것이다.
공동기획: 이투데이, (사)역사 여성 미래, 여성사박물관건립추진협의회
그보다 앞서 1975년 10월에 ‘위안부’였음이 공개된 여성이 있었지만 사람들의 기억에는 남지 않았다.
배봉기(裵奉奇)는 1914년 9월 충남 예산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머슴 일을 했고 어린 남매를 건사하며 남의집살이를 했던 어머니는 배봉기가 6세 때 집을 나갔다. 배봉기 또한 7세 때부터 ‘민며느리’라는 명목으로 남의집살이를 했지만 자주 쫓겨왔기 때문에...
박경원(朴敬元)은 한국과 일본에서 2000년 즈음까지 한국 최초의 여성비행사로 각인됐던 인물이다. 중국군 항공대 소속이었던 권기옥보다 2년 정도 늦게 비행기를 탔지만 말이다. 언론들은 박경원의 성취와 스토리를 자주 보도했고 대중은 문명의 첨단으로 여겨지는 비행기를 탔던 조선 여성에게 열광했다. 연예인과 같은 인기를 누리던 그녀는 비행기...
1949년 귀국한 뒤에는 공군 창설에 참여하는 한편 역사를 기록하는 ‘한국연감’을 발간하고 장학사업을 하였다. ‘권기옥장학금’의 우선순위는 항공인재와 여학생, 역사의식이 올곧은 젊은이였다. 권기옥이 자신의 삶을 보여주는 방식이었다. 1988년 4월 19일 별세했다.
공동기획: 이투데이, (사)역사 여성 미래, 여성사박물관건립추진협의회
당시 백화점 점원은 ‘데파트 걸’로 불리면서 신여성의 하나의 사회 진출 방식으로 인식되고 있었다.
2개월 뒤인 4월에는 개벽사(開闢社)의 제의를 받고 회사 내의 유일한 여성기자로서 잡지 ‘신여성(新女性)’의 기자가 되었다. 첫 기사는 송적성(宋赤城)이라는 필명으로 1931년 4월 ‘신여성’에 실은 ‘내가 신여성이기 때문에’였다. 송계월은 이 글에서...
몰락을 목격한 박자혜는 조선총독부의원의 간호부로서 민족차별을 겪었고, 3·1 만세운동을 주도하면서 ‘민족’의 저항과 단결된 힘을 알았다. 가정을 돌볼 수 없었던 신채호와의 결혼과, 그에 대한 묵묵한 지원은 항일활동을 사명으로 여겼던 박자혜의 필연적 실천 방식이었을 것이다.
공동기획: 이투데이, (사)역사 여성 미래, 여성사박물관건립추진협의회
여성의 단발은 1922년에 은밀히 시작되었다. 강향란(姜香蘭)이라는 전직 기생이 단발을 하고 남자 강습소에 다니다가 ‘발각’되었던 것이다. 1920년대 남성 지식인들은 이 사건에 충격을 받고 조선 여성이 사치와 허영을 좇아 ‘조선의 성질’, ‘여성성’을 버리고 있다고 맹비난을 하였다. 겉멋에 휘둘려 전통을 파괴하고 몰지각하게 근대를 추종하고 있다는 것이다....
송 마리아(1753~1801)는 참봉 송낙휴(宋樂休)의 딸이며, 정조의 이복동생인 은언군(恩彦君) 이인(李裀·1754~1801)의 처이다. 은언군 인과 혼인하여 3남 1녀의 자녀를 두었다.
참봉의 딸인 송 마리아가 왕족 은언군 인과 혼인하면서 가족의 불행은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즉 아들과 남편이 역모를 주도하거나 가담하지 않았음에도 정쟁 속에서 역적으로 지목되었다....
왕실의 최고 어른으로서 지위와 영화를 누렸으나 여성으로서의 삶은 매우 불행하였다. 자녀 1남 3녀 모두 자신보다 일찍 세상을 떠나는 비극을 겪었다. 1830년(순조 30)에는 아들 효명세자(孝明世子, 뒤에 익종으로 추존)를 잃었고, 1832년(순조 32)에는 둘째 딸 복온공주(福溫公主)와 맏딸 명온공주(明溫公主)가 불과 한 달 사이에 잇달아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2년...
은언군 인이 사적으로는 국왕의 동생이지만, 역적으로 지목받은 인물인 만큼 국법에 따라 처분해야 한다는 공론을 일으켰다. 이와 관련하여 여러 차례 직접 한글 교지를 내려 정조와 대립되는 정치력을 행사하였다. 또한 왕대비 고유의 권한인 후사(後嗣)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한글교서를 내렸다. 즉 중전 효의왕후가 병 때문에 후사를 얻을 수 없으니 하루빨리...
정조는 선왕 영조가 사랑했던 사람이며 선왕의 성덕(聖德)에 누가 될까 염려하여 끝내 사약을 내리지 않았다.
마침내 1799년(정조 23) 3월 4일 62세가 된 화완옹주를 용서하라는 하교를 내렸다. 그 후 화완옹주는 서울 도성에 들어와 살게 되었으며, 1808년(순조 8) 5월 17일 71세에 생을 마쳤다.
공동기획: 이투데이, (사)역사 여성 미래, 여성사박물관건립추진협의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