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헌기록에 행적을 남긴 고구려 대부분의 여성들처럼 이름이 전해지지 않는다. 낙랑국 출신의 공주라고 해서 이름처럼 불리고 있는 것이다. 공주의 아버지는 낙랑국의 왕 최리(崔理)이다. 낙랑국의 공주가 고구려 역사에 존재를 남기게 된 것은 고구려 왕자와 혼인을 했기 때문이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고구려 대무신왕(大武神王)의 왕자 호동이 남쪽으로 여행을 갔다가...
왜냐하면 고구려가 ‘광개토(廣開土)’, 즉 ‘널리 땅을 넓혔다’는 것은 바로 고구려가 넓힌 만큼 중국의 땅이 줄어들었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광개토태왕 시호의 끝부분 세 글자를 따서 ‘호태왕’이라고 부른다.
광개토태왕비의 글씨체는 중국의 어느 비석에서도 볼 수 없는 독특한 자체이자 서체이다. 웅장하면서도 섬세하고 질박하면서도...
우리에게는 만주벌판을 호령하며 중국보다도 더 강력한 힘을 가졌던 자랑스러운 고구려의 역사가 있다. 그렇게 강했던 나라가 한반도 안으로 위축되더니 지금은 그마저도 남과 북으로 갈려 미국, 중국, 러시아, 일본의 틈에 끼여 곤욕을 치르고 있는 현실이 안타깝고 부끄럽다. 강한 고구려를 이끌었던 광개토태왕(廣開土太王)이 그립다.
우리는 ‘광개토대왕’이라는...
고구려개발이 광주 솔내음 타운하우스 3단지를 공급한다고 24일 밝혔다. 전용 102㎡(대지면적 132㎡), 전용 155㎡(대지면적 297~627㎡) 등이다. 이미 주변에 100여 가구가 들어서 있고, 공사기간도 짧아 빠른 시일 내 입주가 가능한 게 특징이다. 단독형 맞춤식으로 구조를 설계할 수 있어 도시의 층간소음에서 자유로운 나만의 집을 완성할 수 있는 장점도 있다....
심지어 우리의 옛 고구려 땅인 ‘연변’, ‘집안’, ‘환인’도 다 ‘옌볜’, ‘지안’, ‘환르언’으로 부르고 있다. 배알도 없는 엄청난 사대주의다. 우리에게는 우리의 한자 발음이 엄연히 살아 있음을 상기하여 상호평등의 원칙에 따라 중국이 우리의 지명과 인명을 중국어 발음으로 읽는 한, 우리도 중국의 인명과 지명을 우리의 한자 발음으로 읽어야 할 것이다.
고구려展’, 백남준 첫 회고전 ‘비디오 때, 비디오 땅’ (국립현대미술관, 1992) 등을 개최하기도 한 우리 미술계의 원로다.
인터아트채널 측은 김 대표가 지난 9일부터 11일까지 적지 않은 자비를 들여 세계적 권위의 과학검사 대행업체인 홍콩의 앤티크 오센티케이션 리미티드(Antique Authentication Limited) 감정팀을 초청해 본인과 지인의 소장품에 대해 첨단 과학...
평강공주는 고구려 25대 평원왕(재위 559~590년)의 딸이다. 평원왕은 평강왕이라고도 하였는데, 평강공주라는 이름은 평강왕의 딸이라는 점에서 유래된 것이다.
평강공주의 남편은 온달이다. 외모가 볼품이 없고 가난했으며 재주 또한 없었다. 가진 것이라고는 사람들의 놀림에도 불구하고 구김 없이 밝은 마음씨와 밥을 얻어다가 어머니를 봉양하는 극진한 효심뿐이었다....
김종춘 회장 변호인은 지난 14일 탄원서를 통해 강진청자사건을 계기로 불만을 품은 사람들이 ‘고구려벽화찾기 운동본부’라는 조직을 만들고 비방을 계속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강진청자사건’이란 전국 박물관의 학예사들과 고미술관련 학자들이 서로 짜고 감정가 부풀리기로 수년간 뒷돈을 받고, 국고로 약 270억 원 상당의 유물을 고가로 부정 매입한 사실이...
고구려 5부의 하나인 관나부 출신이며, 부모나 형제 관계는 알 수 없다. 고구려 제12대 중천왕의 총애를 받아 소후(小后)의 물망에 올랐으나 거짓말을 했다고 하여 가죽 부대에 넣어져 바다에 수장되었다.
태어난 시기는 알 수 없고 251년(중천왕 4년)에 사망했다. 얼굴이 아름답고 머리카락의 길이가 아홉 자나 되는 장발(長髮) 미인이다. 중천왕이 소후로 삼으려 하였으나...
더 나아가 ‘발해고’를 지어 발해의 인물, 군현, 왕의 계보, 연혁을 자세히 엮어 종합해 놓았으니, 그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고려가 고구려의 영토를 회복하지 못하였음을 한탄한 것이다.” -1785년 박제가가 쓴 ‘발해고’ 서문 중에서
조선 정조 때의 선비 유득공(柳得恭, 1748. 12.24~1807. 10.1)은 유춘과 남양 홍씨 사이에서 외아들로 태어났지만 증조부 유삼익과 외조부...
백제 개로왕과 고구려 첩자 도림의 이야기다. 한강 이남으로의 남하를 적극 추진하던 고구려 장수왕에 철통 수비로 맞섰던 개로왕은 평소 바둑을 좋아했다고 한다. 장수왕은 바둑을 잘 두고 언변이 유려한 고구려 승려 도림을 개로왕 곁에 있도록 하여, 결국 정사에 소홀하도록 만들었다.
백제 의자왕과 무녀 금화의 사례도 있다. 신라의 첩자 금화는 의자왕에게...
결국 부부는 백제 땅을 떠나 고구려의 산산(蒜山)이라는 곳으로 갔다. 부부의 행색을 본 고구려 사람들이 옷과 먹을 것을 주었다고 한다.
본국에서 맨몸으로 도망쳐 나온 사람들이 다른 나라에서 편하게 살 수는 없었다. 백제에서는 몸종까지 부리며 살았지만 고구려 땅에서는 거지처럼 구차한 삶을 살아야 했다. 그렇지만 어려움 속에서도 도미부인은 끝끝내 혼인의...
◇이름도 성씨도 없는 여인 = 고구려 제9대 왕인 고국천왕의 왕후를 가리키는 우왕후는 정확한 명칭이 아니다. 이름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성씨가 우 씨인 것도 아니다. ‘삼국사기’에 아버지가 우수로 기록되어 있는데, 우수의 딸이라는 의미로 왕후 앞에 우를 성처럼 붙여 칭하였지만 우수의 우도 성씨가 아니다. 고구려에는 왕실 여성이라도 온전히 이름이 알려진...
그녀는 삼국의 영토 쟁탈전에도 본격적으로 뛰어들었다. 지소태후가 섭정을 담당했던 시기에 신라는 고구려의 영향력에서 벗어났으며, 고구려와 백제 영토였던 한강지역을 차지하게 되었다. 또 양나라에 사신을 보내는 등 중국 대륙과의 통교로 국제적인 위상도 드높였다. 신라는 진흥왕대 대내외적으로 발전했는데, 지소태후가 섭정기에 안정적으로 기반을 마련한 덕분이다.
지난 2007년 어느 한 박물관에서 고구려, 고려, 조선시대 밥그릇과 요즘 쓰는 밥그릇에 각각 쌀을 담아 무게를 비교한 결과를 공개했다. 요즘 쓰이는 밥그릇에는 350g의 쌀이 들어간 반면 고구려시대 밥그릇을 채우는 데는 무려 1,300g이나 필요했다. 거의 네 배 가까운 분량이다. 또 고려시대 밥그릇에는 1,040g, 조선시대 밥그릇에는 690g의 쌀이 각각 들어갔다. 실제로 밥을...
'도쿄김장문화제'는 1300년 전 현해탄을 건너 일본에 정착한 고구려 후손들이 사이타마현 고마진자(고구려의 마지막 왕인 고약광을 기리는 신사)에서 2005년부터 매년 배추를 재배하고 김장을 담가온 것이 유래됐다.
한‧일 양국의 김장문화제를 연계·개최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지난 8월 노들섬과 일본 고마진자에서 각각 배추 모종심기행사를 가진데 이어...
요서 지방에서 기원한 고조선과 이를 이어온 고구려와 발해의 숱한 역사 기록을 보라. 한반도 한사군 설은 20개가 넘는 전 세계 1차 사료 어디에도 근거가 없다. 만주로 확장된 신라, 고려, 조선의 역사 자료는 왜 무시하는가. 역사 기록들의 존중이 역사의 근본이다.
북핵과 통일은 역사 바로잡기와 직결된 문제다. 국민들의 관심과 지도자의 역사 의식이 북핵과 북한 문제...
그런데 한국아마추어천문학회의 황보 승 회원이 이 오성이 한곳에 모이는 오성결집 기록을 배달국, 고구려, 고려 역사에서 확인했다고 발표했다. 나는 2014년 3월 11일 자 모 언론사 칼럼에서 고조선의 오성결집이 한곳에 모이는 ‘환단고기’ 기록이 천문학적으로 사실임을 이미 설명한 바 있다. ‘환단고기’의 ‘무진오십년오성취루(戊辰五十年五星聚婁)’는...
고구려 동천왕 20년(246)조에 “위(魏)나라 유주자사 관구검(毌丘儉)이 현도로 침범해서…낙랑으로 퇴각했다”는 기록이 있는데, 현재 베이징 부근인 유주자사 관구검이 고구려를 침공했다가 퇴각한 곳이 낙랑이라면 낙랑은 평양일 수 없다고 본 것이다. ‘위서(魏書)’ 가평(嘉平) 4년(252)조에 보면 관구검은 진남(鎭南)장군이 되어 중국 남방 오나라 정벌에 나서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