옷은 답을 알고 있다⋯스티브 잡스의 터틀넥부터 젠슨 황의 가죽재킷까지 [이슈크래커]

입력 2026-06-08 17: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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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비디아 젠슨 황 최고경영자(CEO)가 5일 오후 서울 마포구 T1베이스 캠프를 방문하고 있다. 고이란 기자 photoeran@
▲엔비디아 젠슨 황 최고경영자(CEO)가 5일 오후 서울 마포구 T1베이스 캠프를 방문하고 있다. 고이란 기자 photoeran@

젠슨 황 엔비디아 최고경영자(CEO)가 서울을 찾았습니다. 디올 자수 재킷을 입고 등장했고, 물론 익숙한 검은 가죽 재킷도 빼놓지 않았습니다. 구글 트렌드를 보면 최근 1주일 '젠슨 황 가죽 재킷' 검색량은 평소보다 450% 가까이 급증했습니다.

이쯤 되면 재킷은 하나의 이벤트입니다. CEO가 입은 옷 한 벌에 검색어가 움직이고, 소비자들의 관심이 쏠리며, 때로는 기업 이미지까지 영향을 받습니다. 그런데 이런 현상은 언제 시작된 걸까요. 최고경영자의 옷차림은 언제부터 개인 취향이 아니라 경영 전략의 일부가 됐을까요.

흥미로운 점은 시대마다 그 의미가 조금씩 달랐다는 것입니다. 어떤 시기에는 신뢰를 보여주기 위한 상징이었고, 어떤 시기에는 혁신의 깃발이었습니다. 최근에는 권력과 영향력을 드러내는 도구로도 읽힙니다. 하지만 공통점도 있습니다. 사람들은 복잡한 기업보다 단순한 이미지를 기억합니다. 그리고 뛰어난 경영자들은 그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죠. 스티브 잡스의 터틀넥, 마크 저커버그의 회색 티셔츠, 젠슨 황의 가죽 재킷. 이제 서울의 총수들까지, 옷에 담긴 권력의 역사를 한번 따라가 보겠습니다.

1980년대 — 첫 목표는 '신뢰'였다

▲리 아이아코카 크라이슬러 회장. (AP 통신)
▲리 아이아코카 크라이슬러 회장. (AP 통신)

지금은 CEO가 하나의 스타처럼 소비되지만, 원래부터 그랬던 것은 아닙니다. 1970년대까지만 해도 미국 실리콘밸리와 월스트리트의 경영자들은 대중에게 거의 보이지 않는 존재였습니다. 회색 정장을 입고 조직 뒤에 서 있는 사람들이었죠. 옷도 개성을 드러내기보다 조직에 녹아들기 위한 일종의 유니폼에 가까웠습니다.

분위기가 달라진 것은 1980년대입니다. 파산 위기에 몰렸던 크라이슬러를 되살린 CEO 리 아이아코카가 등장하면서입니다.

아이아코카 회장은 정부로부터 약 12억달러 규모의 보증 대출을 받아낸 뒤 직접 TV 광고에 나섰습니다. "더 좋은 차를 찾으면 그걸 사십시오." 자동차 회사 CEO가 자신의 제품을 일방적으로 자랑하지 않고 이런 말을 한다는 것은 당시로선 꽤 파격적인 일이었습니다. 그는 회사의 실패를 숨기지 않았고, 대신 "우리가 달라졌다"고 설득했습니다. 정갈한 정장 차림과 차분한 화법은 마치 믿을 만한 가장이나 동네의 든든한 사업가를 떠올리게 했습니다.

소비자들은 반응했습니다. 크라이슬러는 대출금을 예정보다 7년 먼저 상환했고, 아이아코카 회장의 자서전은 36주 동안 베스트셀러 1위에 올랐습니다.

사람들은 자동차를 산 것이 아니라 CEO를 믿었습니다. 그리고 그 믿음에는 그의 말뿐 아니라 옷차림과 태도, 화면 속 이미지까지 함께 작용했습니다. CEO의 얼굴이 기업의 브랜드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이 처음으로 대중 앞에서 드러난 순간이었죠.

2000년대 — 표적은 '권위', 무기는 청바지

▲스티브 잡스 전 애플 최고경영자(CEO)가 2010년 12월 27일 새로운 아이패드를 소개하고 있다. (샌프란시스코(미국)/AP뉴시스)
▲스티브 잡스 전 애플 최고경영자(CEO)가 2010년 12월 27일 새로운 아이패드를 소개하고 있다. (샌프란시스코(미국)/AP뉴시스)

정장을 무너뜨린 건 패션 디자이너가 아니라 IT 창업가들이었습니다. 2000년대 초반 벤처 붐이 일어나자 실리콘밸리의 젊은 창업자들은 월스트리트식 권위와 거리를 두기 시작했습니다. 투자설명회 무대에 청바지를 입고 올라갔고, 넥타이 대신 셔츠 차림을 택했습니다. 그리고 그 흐름의 중심에는 스티브 잡스가 있었습니다.

오늘날 잡스를 떠올리면 자연스럽게 검은 터틀넥이 따라오지만, 사실 그 옷도 우연에서 시작됐습니다. 월터 아이작슨의 전기에 따르면 잡스는 1980년대 초 일본 소니 공장을 방문했다가 직원들이 입은 통일된 유니폼에 깊은 인상을 받았습니다. 그 유니폼을 디자인한 사람이 일본의 거장 디자이너 이세이 미야케였습니다.

잡스는 애플에도 비슷한 유니폼 문화를 도입하려 했습니다. 결과는 처참했습니다. 직원들이 강하게 반발한 것입니다. 훗날 그는 "모두가 그 아이디어를 끔찍하게 싫어했다"고 회상했습니다. 결국 잡스는 방향을 바꿨습니다. 직원들에게 입히는 대신 자신이 입기로 한 것입니다. 이후 친구가 된 미야케에게 검은 터틀넥을 여러 벌 만들어 달라고 부탁했고, 미야케는 100벌이 넘는 터틀넥을 보냈습니다.

잡스는 늘 같은 옷을 입는 이유로 '결정 피로를 줄이기 위해서'라고 설명했습니다. 실제로 그 말도 맞았을 겁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 옷에서 다른 의미도 읽었습니다. 검은 터틀넥과 청바지, 운동화 차림은 당시 기업인들의 유니폼이던 정장과 넥타이의 정반대였기 때문입니다. 복잡한 형식보다 제품과 아이디어에 집중하는 사람, 회의실보다 차고와 연구실에 어울리는 사람이라는 인상을 단번에 만들었죠. 제품에 집중하게 만드는 효과도 있었습니다.

결국 잡스는 이 단순함으로 혁신적인 제품을 만들었고, 터틀넥은 어느새 혁신가의 상징처럼 굳어졌습니다. 원래는 단순한 개인 복장이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애플의 철학과 잡스라는 인물을 설명하는 하나의 로고가 되었죠.

2010년대 — '친근함'을 입고 부를 숨기다

▲마크 저커버그 메타 최고경영자(CEO)가 2019년 10월 25일 미국 뉴욕의 페일리센터에서 미국 사용자를 대상으로 시범 서비스를 시작한 ‘뉴스 탭’에 관해 얘기하고 있다. (뉴욕(미국)/AP뉴시스)
▲마크 저커버그 메타 최고경영자(CEO)가 2019년 10월 25일 미국 뉴욕의 페일리센터에서 미국 사용자를 대상으로 시범 서비스를 시작한 ‘뉴스 탭’에 관해 얘기하고 있다. (뉴욕(미국)/AP뉴시스)

2010년대에 들어서면서 상황은 또 한 번 달라집니다. SNS가 일상이 되자 CEO들은 언론을 통하지 않고도 대중과 직접 소통할 수 있게 됐습니다. 이제 최고경영자의 이미지는 기업 홍보의 부수적인 요소가 아니라, 'PI(President Identity·최고경영자 이미지 관리)'라는 하나의 경영 전략으로 발전했습니다. 어떤 옷을 입고 등장하느냐가 기사 제목이 되고, 때로는 기업 이미지까지 좌우하는 시대가 열린 것입니다.

그 중심에는 마크 저커버그가 있습니다. 페이스북 시절부터 그를 상징하는 것은 늘 회색 티셔츠였습니다. 특별할 것 없어 보이는 옷입니다. 대학 캠퍼스에서 흔히 볼 수 있을 법한 차림이죠. 저커버그 역시 스티브 잡스처럼 "사소한 선택에 에너지를 쓰고 싶지 않다"며 같은 옷을 반복해서 입는 이유를 설명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는 흥미로운 반전이 있습니다. 저커버그의 회색 티셔츠는 동네 마트에서 산 제품이 아니었습니다. 대부분 이탈리아 럭셔리 브랜드 브루넬로 쿠치넬리의 제품으로 알려졌습니다. 한 벌 가격이 수백 달러에 달하는 고급 의류입니다. 얼핏 보면 평범한 티셔츠인데, 알고 보면 상당히 비싼 옷인 셈입니다.

그래서 저커버그의 패션은 묘한 인상을 남깁니다. 겉으로는 "나도 여러분과 다르지 않다"는 메시지를 보내지만, 동시에 세계 최고 부자 중 한 명이라는 사실도 숨기지 않습니다. 과거 기업인들이 명품 시계와 맞춤 정장으로 성공을 드러냈다면, 실리콘밸리 세대는 오히려 평범함 자체를 새로운 사치품처럼 활용하기 시작한 것이죠.

2020년대 — 더 빨라진 혁신, 표적은 '권력' 그 자체

▲젠슨 황 엔비디아 최고경영자(CEO)이 8일 서울 종로구 SK 서린사옥 로비에서 최태원 SK그룹 회장과 함께 SK와 엔디비아 협력 관련 언론 브리핑을 하고 있다. 고이란 기자 photoeran@
▲젠슨 황 엔비디아 최고경영자(CEO)이 8일 서울 종로구 SK 서린사옥 로비에서 최태원 SK그룹 회장과 함께 SK와 엔디비아 협력 관련 언론 브리핑을 하고 있다. 고이란 기자 photoeran@

오늘날 시장이 CEO에게 기대하는 역할은 예전과 조금 다릅니다. 믿음직한 경영자나 혁신적인 창업자를 넘어, 거대한 기술 생태계를 상징하는 인물이어야 합니다. 엔비디아의 황 CEO가 늘 검은 가죽 재킷을 입고 등장하는 것도 그런 시대 분위기와 무관하지 않습니다.

황 CEO는 적어도 20년 가까이 가죽 재킷을 자신의 상징처럼 입어 왔습니다. 2016년 온라인 문답에서는 스스로를 "가죽 재킷 입은 사람"이라고 소개하기도 했습니다. 올해 초 CES 무대에서 입은 톰 포드 가죽 재킷은 행사 직후 온라인에서 품절 사태를 일으켰고, 신제품 발표보다 재킷 이야기가 더 많이 나왔다는 말까지 나왔습니다. 정작 본인은 "아내와 딸이 옷을 골라준다"고 담담하게 말하지만 말이죠.

흥미로운 건 가죽 재킷이라는 선택입니다. 원래 이 옷은 제임스 딘, 비틀스와 데이비드 보위 같은 인물들을 통해 반항과 자유의 상징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흔히 떠올리는 공학자나 프로그래머의 이미지와는 거리가 있습니다. 그래서 더 눈에 띕니다. 반도체를 설계하는 엔지니어 출신 CEO가 록스타의 유니폼을 입고 무대에 오르는 셈이니까요.

뉴욕타임스는 황 CEO의 패션에서 가장 중요한 점은 오히려 '늘 똑같다'는 데 있다고 분석했습니다. 사람들은 복잡한 기술보다 익숙한 이미지를 더 빨리 기억합니다. 검은 가죽 재킷은 멀리서도 그를 알아보게 만드는 일종의 로고가 된 셈입니다. '드레스 코드'의 저자 리처드 톰슨 포드 스탠퍼드대 교수도 비슷한 이야기를 합니다. 만약 그가 평범한 정장이나 폴로셔츠 차림이었다면 수많은 기업 임원 가운데 한 명으로 보였을 가능성이 크다는 것입니다.

물론 황 CEO는 필요할 때 변화를 줄 줄도 압니다. 올해 춘절 기간 중국에서는 붉은 꽃무늬 조끼를 입고 전통 춤을 췄고, 이번 방한 때는 디올의 자수 셔츠 재킷을 선택했습니다. 가격과 브랜드도 화제가 됐지만, 사실 더 중요한 것은 다른 데 있습니다. 사람들은 이제 엔비디아의 신제품만 보는 것이 아니라 젠슨 황이라는 인물 자체를 하나의 콘텐츠처럼 소비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어쩌면 AI 시대 CEO의 옷은 신뢰를 얻기 위한 도구도, 혁신을 상징하기 위한 장치도 아닐지 모릅니다. 그보다 먼저 사람들의 시선을 붙잡는 역할을 합니다.

그렇다면 한국은? — 여전히 '정장'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 (연합뉴스)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 (연합뉴스)

여기서 흥미로운 차이가 하나 드러납니다. 미국의 테크 CEO들은 특정 옷을 평생의 유니폼처럼 입는 경우가 많지만, 한국 기업인들은 여전히 정장을 기본으로 삼습니다. 공식 석상에서는 빈틈없는 양복과 넥타이가 표준입니다. 스티브 잡스의 터틀넥이나 젠슨 황의 가죽 재킷처럼 하나의 복장으로 자신을 각인시키는 사례는 드뭅니다.

대신 한국 총수들은 다른 방식을 택합니다. 늘 캐주얼을 입기보다, 꼭 필요한 순간에만 정장을 벗습니다. 그래서 더 눈에 띕니다.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이 대표적입니다. 해외 출장길 공항에서 입은 옷은 종종 화제가 되고, 일부 제품은 곧바로 품절되기도 합니다. 2026년 3월 유럽 출장에서 귀국하며 입은 흰색 패딩 조끼 역시 큰 관심을 받았습니다. 해당 제품은 이탈리아 브랜드 브루넬로 쿠치넬리 제품으로 알려졌는데, 흥미롭게도 마크 저커버그와 정의선 현대차그룹 회장도 즐겨 입는 브랜드입니다. 눈에 띄게 과시하지 않지만, 아는 사람은 알아보는 '조용한 럭셔리'인 셈입니다.

2025년 가을 서울의 한 치킨집에서 열린 이재용 회장, 정의선 회장, 젠슨 황의 이른바 '깐부 회동'도 비슷한 장면이었습니다. 세 사람은 양복 대신 편안한 차림으로 치킨과 맥주를 나눴습니다. 글로벌 기술 기업 수장들의 만남이었지만 분위기는 의외로 소탈했습니다. 아마 그래서 더 강한 인상을 남겼는지도 모릅니다.

옷은 답을 알고 있다

CEO의 옷은 생각보다 많은 이야기를 합니다.

1980년대 리 아이아코카의 정장은 "회사를 믿어 달라"는 메시지였고, 스티브 잡스의 터틀넥은 "형식보다 아이디어가 중요하다"는 예시였습니다. 마크 저커버그의 회색 티셔츠는 실리콘밸리식 평등 문화를 상징했고, 젠슨 황의 가죽 재킷은 기술 기업 CEO를 록스타처럼 보이게 만들었습니다.

시대는 바뀌었지만 한 가지는 크게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은 복잡한 기업보다 한 사람의 얼굴을 먼저 기억합니다. 그리고 뛰어난 경영자들은 그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압니다. 그래서 어떤 이는 터틀넥을 입고, 어떤 이는 가죽 재킷을 입습니다. 또 어떤 이는 평소엔 정장을 입다가도 결정적인 순간에만 캐주얼을 꺼내 듭니다.

어쩌면 옷은 원래부터 답을 알고 있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우리가 기업을 이해한다고 생각할 때, 사실은 그 기업을 상징하는 한 사람의 이미지를 먼저 기억하고 있다는 사실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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