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 시각] ‘속전속결’ 빵값 인하를 지켜본 씁쓸함

입력 2026-03-04 04:00

기사 듣기
00:00 /
  • 가장작게

  • 작게

  • 기본

  • 크게

  • 가장크게

▲이투데이 생활경제부장 (사진=고이란 기자)
▲이투데이 생활경제부장 (사진=고이란 기자)
“매번 제품 가격 인상은 초스피드, 가격 인하는 굼뜨기만 했는데...이번 정부에선 이렇게 빨리 값을 내리는 게 놀랍네요.”

최근 만난 한 소비자시민단체 관계자의 말이다. 그도 그럴 것이 역대급 규모의 설탕·밀가루 가격 담합 조사 결과 발표 직후 제당·제분업계는 일제히 가격 인하를 단행했다. 뒤이어 설탕·밀가루를 가장 많이, 자주 사용하는 베이커리업계까지 제품 값 인하 대열에 동참했다. 마치 사전에 담합이라도 한 듯 가격 인하가 이뤄졌다. 국내 최대 베이커리 프랜차이즈 ‘파리바게뜨’ 발표 이후 2시간 만에 ‘뚜레쥬르’가 가세했다. 시민단체 관계자의 말처럼 업계의 가격 인하가 이렇게 속전속결인 것은 낯설기 그지없는 풍경이다.

고물가 시대, 국민의 장바구니 부담을 덜어주려는 정부의 노심초사(勞心焦思)가 통한 것일까. 치솟는 외식 물가와 가공식품 가격 앞에서 서민들의 시름이 깊어졌으니 국가가 시장에 개입해 물가의 고삐를 죄는 것은 환영할 만한 일이다. 기업들의 재빠른 가격 인하도 ‘고통 분담’ 차원에서 칭찬할 일이다.

하지만 사실상 정부 압박에 의해 이뤄진 이러한 ‘가격 지도’가 되레 언발에 오줌 누기가 되는 것은 아닐지 우려스럽다. 기업의 고유한 경영권인 ‘가격 결정권’을 무시해선 안되기 때문이다. 기업에 있어 제품 값은 단순히 이윤의 척도가 아니라 인건비, 물류비, 에너지 비용, 그리고 미래를 위한 연구개발비가 응축된 경영의 결과물이다. 원재룟값 하나가 내렸다고 해서 가격 인하를 강제하는 방식은 기업의 복잡한 경영 메커니즘을 경직되게 만들 우려가 크다.

정부의 개입이 있어야 하되 ‘완급 조절’의 묘가 필요한 이유다. 압박에 의한 인위적인 가격 인하는 기업의 자발적인 혁신 의지를 꺾고, 장기적으로는 투자를 위축시켜 산업의 기초 체력을 약화할 수 있다. 기업이 스스로 시장의 흐름에 따라 가격을 책정하되, 사회적 책임을 다할 수 있도록 독려하는 ‘부드러운 개입’이 절실한 시점이다. 가격을 억누르는 공권력의 권위보다는, 시장이 스스로 균형을 찾아갈 수 있도록 뒷받침하는 조력자로서의 정부 역할이 더 중요하다.

이제는 가격 통제라는 단기적인 수단에서 벗어나 시장의 질서를 바로잡을 근본적인 ‘제도적 장치’에 주목해야 한다. 특히 식품업계에서 반복되는 가격 담합 문제는 정부의 행정지도만으로는 한계가 명확하다. 담합을 통해 얻는 이익보다 과징금이 적거나, 정부의 눈치만 살피면 된다는 인식이 팽배하다면 시장의 왜곡은 반복될 수밖에 없다.

이 대목에서 눈여겨봐야 할 대안이 바로 ‘미국식 집단소송제’의 도입이다. 현재 우리나라는 담합이 적발돼도 기업이 국가에 과징금을 내는 것으로 상황이 종료되기 일쑤다. 정작 비싼 가격에 제품을 구매해 피해를 본 개별 소비자들의 피해 보상은 어렵다.

반면 미국식 집단소송제는 피해자 중 한 사람이 승소하면 나머지 피해자들도 별도의 소송 없이 배상을 받을 수 있는 구조다. 만약 미국처럼 소비자가 기업을 상대로 직접 구상권을 행사할 수 있는 강력한 무기가 쥐어진다면, 정부가 일일이 기업의 팔을 비틀며 가격을 내리라고 압박할 필요가 없어진다. 기업들은 소비자들의 집단적인 감시와 소송 리스크를 피하기 위해서라도 스스로 투명하고 합리적인 가격 정책을 세울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물가 안정은 정부(제도 개선)와 기업(자정 노력), 소비자(물가 감시)가 각자 제 역할을 할 때 비로소 완성된다. ‘관제 물가’라는 비판이 나오는 지금 필요한 것은 기업을 굴복시키는 권위가 아니라 시장의 공정성을 담보하는 ‘제도적 신뢰’다. 정부 개입은 최소화하되 그 효과는 날카로워야 하며, 소비자의 주권은 선언에 그치지 않고 실질적인 법적 권리로 보장받아야 한다. 그것이 상생의 가치를 지키면서도 건강한 시장 경제를 지속시키는 유일한 길이다.

  • 좋아요0
  • 화나요0
  • 슬퍼요0
  • 추가취재 원해요0

주요 뉴스

  • 돌아온 외국인, 코스피‧코스닥 모두 사들여…개인과 장 초반 상승 견인
  • 트럼프, 이란 '반정부 세력'과 접촉⋯이스라엘 매체 "쿠르드 지상전 시작돼"
  • 미국 사모대출 불안 확산…블랙스톤 5조원대 환매
  • 단독 '구글 갑질' 우려에 “우리 소관 밖”...책임만 떠안은 韓 기업 [지도 주권의 민낯]
  • 뉴욕증시, 이란 우려 완화에 반등…유가, 진정세 [글로벌마켓 모닝 브리핑]
  • 단독 예보, 라임 피해보전 착수⋯ 파산재단 자산 공매 [공적자금 회수 본격화]
  • 패닉셀 공포 확산…이틀 새 코스피 시총 ‘우리나라 1년 예산’보다 많이 증발[증시 패닉데이]
  • "사무실 대신 현장"...車정비·건축·용접 배우는 2030 [AI시대, 기술직의 재발견]
  • 오늘의 상승종목

  • 03.05 12:55 실시간

실시간 암호화폐 시세

  • 종목
  • 현재가(원)
  • 변동률
    • 비트코인
    • 105,390,000
    • +6.32%
    • 이더리움
    • 3,073,000
    • +7.19%
    • 비트코인 캐시
    • 669,500
    • +3.4%
    • 리플
    • 2,064
    • +4.45%
    • 솔라나
    • 130,900
    • +4.22%
    • 에이다
    • 398
    • +3.65%
    • 트론
    • 414
    • +0.73%
    • 스텔라루멘
    • 229
    • +3.62%
    • 비트코인에스브이
    • 22,140
    • +3.12%
    • 체인링크
    • 13,440
    • +5%
    • 샌드박스
    • 126
    • +3.28%
* 24시간 변동률 기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