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인희 칼럼] 현수막 유감

입력 2016-01-28 10: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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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인희 이화여대 교수

며칠 전 최저 기온이 영하 19도를 기록했던 날 아침 8시 출근길, 교통량이 제법 많은 사거리에서 자신의 이름 석 자가 적힌 포스터를 높이 들고, 지나가는 운전자들을 향해 연신 고개를 숙이는 예비 후보자를 본 적이 있다. 매서운 추위에 시린 발을 구르면서 한 표를 호소하는 모습을 보며 절실함 너머로 씁쓸함이 교차했다.

바야흐로 총선의 계절이다. 서울은 아직 현수막 싸움(?)이 본격화되진 않은 듯한데, 서울을 조금만 벗어나면 곳곳에서 출사표를 알리는 현수막이 요란하게 나부끼는 풍경이 낯설지 않다. 세계 최고 수준을 자랑하는 프린팅 기술에 힘입어 ‘현수막 정치’가 꽃을 피우고 있는 듯도 한데, 시민의 한 사람으로서 요란한 현수막을 바라보는 마음이 편치만은 않다.

언젠가 복숭아밭과 포도밭이 길게 이어지는 시골길을 지나가는데 전봇대 사이에 걸려 있던 현수막이 눈에 들어왔다. ‘○○ 이장님 댁 따님 △△여대 □□ 박사학위 취득을 축하합니다.’ 한 해에만 수백명이 박사모(博士帽)를 쓰는 장면에 익숙해 있던 나로선 웃음이 절로 나는 현수막이었지만, 그 마을에선 여자 박사의 탄생이 현수막까지 걸며 축하를 표해야 할 경사였던 셈이다.

2000년 당시 김대중 대통령의 노벨 평화상 수상이 확정되자, 정부종합청사를 위시하여 크고 작은 건물 곳곳에 축하 현수막이 걸렸다. 1901년 시상을 시작한 이래 100여년 만에 한국인으로선 최초로 노벨상을 받는 대기록을 세웠으니, 현수막을 걸어 축하하지 않을 도리가 없었을 법하다. 한데 유독 눈길을 끌던 현수막이 하나 있었는데, 그건 경복궁 돌담을 끼고 청와대로 진입하는 세종로 길에 지역 주민들이 내건 현수막이었다. ‘대통령님의 노벨 평화상 수상을 진심으로 경하드립니다.’ 현수막을 건 주인공이 지역 주민들이란 사실로 인해 그 의미를 곰곰 씹어보던 기억이 새롭다.

해마다 사법고시, 행정고시는 물론이요 각종 고시급 합격자를 대거 배출하는 서울대에선 합격생을 축하하기 위한 현수막을 굳이 내걸지 않는다. 하지만 모처럼 서울대 기록을 앞지른다거나 어쩌다 합격생을 배출한 대학교에선 예외 없이 자축(自祝)하는 현수막을 걸게 마련이다. 그런 점에서 현수막 자체는 우리 스스로 일등이 아님을 공개하고 인정하는 표식인지도 모를 일이다.

현수막에는 유독 세계 최초, 세계 유일, 국내 최고, 국내 최다 등 최상급을 강조하는 표현이 단골로 등장하곤 한다. 이 또한 세계가 인정해주는 진짜 일류라면 굳이 이를 내세우거나 자랑할 필요가 없다는 데 생각이 미치면, 현수막을 통해 세계 최초, 국내 유일을 들먹이는 것 자체가 행여 열등감의 표현은 아닌가 하여 자괴감이 들기도 한다.

서울을 비롯한 대도시에선 익명적 특성이 강한 만큼 정치적 동향 파악이 쉽지 않지만, 대도시를 벗어난 지역에선 피차 뉘 집 자식인지도 알고, 어린 시절 품성도 심심치 않게 화제가 되는 데다, 같은 성씨(姓氏) 문중의 영향력도 여전한 덕분에 혈연·지연·학연 모든 연줄망이 적극 작동하게 마련이다.

그 와중에 선거법은 더욱 엄중해지고 감시의 눈초리 또한 날카로워지고 있어 현수막 경쟁이 더욱 치열해지고 있는 건 아닐는지. 지난번 총선 때만 해도 읍내 전체가 후보자들 얼굴과 홍보 자료로 뒤덮이던 것도 모자라, 5층 건물 전체를 현수막으로 감싼 국회의원 후보 얼굴을 보며 입을 다물지 못했던 적도 있었다. 이쯤 되면 자원 낭비를 넘어 현수막 공해라 불러도 손색이 없을 것 같았다.

선거철 현수막이란 그 표면에 이미 거품이 풍성하게 끼여 있고 허풍에 과장까지 잔뜩 담겨 있는 데다 때론 열등감을 그럴듯한 포장지로 숨기고 있거늘, 이제 유권자들도 대형 현수막이나 호화 홍보자료에 현혹되지 않는 예리한 안목을 연마해야 할 것 같다. 어차피 후보자의 진정성은 현수막을 필요로 하지 않는 법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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