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경아의 라온 우리말터]김장의 추억

입력 2014-11-07 10: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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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부 교열기자

어린 시절 김장하는 날은 잔칫날이었다. 어머니와 이웃집 아주머니들이 소금물에 절인 배추를 씻으면 작은오빠는 열심히 펌프질을 해 고무대야마다 물을 한 가득씩 채웠다. 아버지와 큰오빠는 땀을 뚝뚝 흘리며 마당 한쪽을 파 그 안에 김장독을 묻었다. 생굴, 갓, 파, 무채와 새우젓갈을 고춧가루 양념에 벌겋게 비벼 놓으면 할머니께선 노릇노릇한 배춧속에 미리 삶아 둔 돼지고기와 함께 싸서 아버지부터 순서대로 입에 넣어 주셨다. 속대쌈이 내 입속으로 들어오면 매콤하면서도 고소한 그 맛이 좋아 입가가 벌게지도록 먹었다. 추위에 떨면서 기다린 보람을 느끼는 순간이다. 그날 저녁 집안이 조용해지면 어머니는 김장독을 흐뭇한 표정으로 한참 보셨다. 먹을 것이 귀하던 그 시절 김장은 소소한 반찬이 아니라 춥고 기나긴 겨울을 보낼 귀중한 양식이었다.

이달 들어 기온이 크게 떨어지면서 지자체는 물론 금융권, 대학, 기업 등이 앞장서 ‘김장나눔축제’, ‘사랑의 김장 나누기’ 등 어려운 이웃의 따뜻한 겨울나기를 위한 행사를 열어 훈훈함을 전하고 있다. 그런데 행사 관련 홍보 문구를 들여다보면 ‘사랑으로 담은 김치 이웃에 전해요’, ‘김치 담궈 이웃사랑 실천’ 등 잘못된 표현들이 행사의 이미지를 떨어뜨리고 있다.

‘김치·술·장·젓갈 따위를 만드는 재료를 버무리거나 물을 부어서, 익거나 삭도록 그릇에 넣어 두다’라는 뜻의 우리말은 ‘담그다’이다. ‘김치를 담그다, 복분자주를 담그다, 된장·고추장을 담그다’가 대표적인 예다. 따라서 ‘사랑으로 담은 김치…’, ‘김치 담궈…’는 ‘사랑으로 담근 김치…’, ‘김치 담가…’라고 해야 바른 표현이다. 많은 사람들이 헷갈려 하는 ‘담다’는 ‘어떤 물건을 그릇 따위에 넣다’란 의미다. ‘먹음직스러운 김장김치를 항아리에 담았다’, ‘쌀독에 쌀을 담다’, ‘고구마를 바구니 한가득 담다’처럼 쓴다. 즉, 김장을 이를 때는 ‘김치를 담그는 날/김치를 담그는 법’이라 하고, 김치를 용기에 넣을 때는 ‘김치를 김치냉장고(항아리, 김치통)에 담다’라고 바르게 구분해 써야 한다. 아울러 우리말에 ‘담구다’라는 단어는 없다.

김치를 담글 때 갓·파·무채·마늘·젓갈 등을 고춧가루에 버무려 절인 배추에 넣는 재료를 ‘김치속’이라 말하는 이가 많은데 이 또한 올바른 표현이 아니다. ‘김치 속’은 ‘김치 겉’의 반대말이다. 김치에 겉과 속이 있단 말인가. 김치에 넣는 재료는 ‘소’가 올바른 표현이다. 만두, 송편의 맛을 내기 위해 속에 넣는 ‘소’와 같은 말이다. 따라서 ‘김칫소’라고 해야 한다. 김칫소에 들어가는 젓갈도 참 다양하다. 그중 ‘황새기젓’이 인기가 높은데 이 역시 사람들이 잘못 쓰는 말이다. 바른말은 ‘황석어젓’이다. ‘황석어(黃石魚)’란 참조기를 가리키는 한자어로 누런 빛을 많이 띤다고 해서 붙여졌다.

맛에는 추억이 담겨 있다. 음식을 먹으며 누군가를 떠올리고, 아픈 혹은 즐거운 느낌을 받는 건 그 맛에 녹아 있는 기억 때문이다. 어느 때부터인가 파는 김치가 식탁을 점령했다. 그러면서 위생 등 안전문제가 불거지고 김치 인심은 점점 사나워졌다. 올해는 배추가 풍년이라니 온 가족이 날 잡아 모여 김장을 해보는 건 어떨까. 김이 모락모락 나는 하얀 쌀밥에 새빨간 김치를 얹어 먹는 상상에 벌써부터 입안에 침이 고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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