즉, 조선총독부에서 만든 식민사관 이론들을 실증사관이란 이름으로 해방 후에도 하나뿐인 정설로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다가 학자들은 물론 일반인들도 중국 고대 사료들을 쉽게 접할 수 있게 되면서 수세에 몰렸다.
식민사관의 핵심이론 중의 하나인 ‘한사군=한반도설’을 입증하는 중국 사료는 전무하다시피한 반면 한사군이 지금의 하북성 일대에...
이 표현을 일제 강점기 조선에 적용하면, ‘조선총독부 지배층은 일본인이고, 피지배층은 조선인이며, 총독부에 조선인 하급 관리도 있었고, 친일파들은 여전히 조선의 지배층이었기 때문에 당시 조선을 일제 식민지로 보기 어렵다’는 논리와 같다. 섬뜩한 주장이다. 식민지 근대화론보다 더 조선총독부 통치를 합리화하는 관점이다.
마지막으로 ‘한사군 한반도설...
그리고 다른 학자들은 왕험성이 요동군이나 창려군의 험독현이라고 주석했으므로 그곳이 만주였음을 알 수 있으며, 왕험성이 지금의 평양이었다는 학계의 주장이 조선총독부의 식민사관을 추종한 잘못임을 확인하게 된다.
한편 한(漢) 무제가 서기전 109년 위만조선의 우거왕을 칠 때 수군대장 양복이 ‘제(齊)나라를 따라 발해에 떠서(從齊浮渤海)’ 열구라는 곳에...
광복 후 법적으로 친일잔재를 청산하지 못했고 역사에서라도 응징해야 하는데 그것도 되지 못했다”며 “우리 역사를 일제 조선총독부 관점에서 바라보는 노예의 역사학이자 매국사, 친일사, 자학사 등 다양한 형태로 표현되는 게 우리 역사학계의 주류였다”고 비판했다. 허 대표는 “그래서 혁신해야 한다. 오늘날 역사적 정체성을 확립하지 못하면 혁신이 불가능하다....
지금의 역사서술 체계가 조선총독부에서 만든 식민사관이 아니냐는 항변이다. 해방 이후에도 조선총독부 사관을 고집하려다 보니 이들은 자신들의 역사관을 실증주의라고 합리화했다. 그러나 실제 역사 사료가 공개되면서 이들이 주장하는 실증 역시 사료를 자의적으로 해석하거나 불리한 사료는 없는 것으로 치부하는 가짜 실증이라는 사실도 드러나고 있다....
하지는 좌익 폭동을 막고 정부 기능을 유지한다는 명목으로 조선총독부 인사들을 인정해 친일세력이 뿌리를 내리는 단초를 제공했다.
야전군인 하지가 온갖 정치세력이 첨예하게 대립하는 한반도 상황을 슬기롭게 풀어나가는 것은 역부족이었다. 한국사에서 미군정 시대 3년은 또 하나의 아쉬운 순간이 아닐 수 없다. 배준호 기자 baejh94@
2절의 ‘삼백년 원한 품은’을 ‘삼백년 원앙풍은’으로 바꿔 조선총독부에 제출하면서 검열 때문에 발매하지 못할 수 있다는 소문을 퍼뜨려 사람들의 관심과 분노를 조장했다. 노이즈 마케팅이 이 노래의 ‘대박’을 도왔다.
스물한 살에 김해송과 결혼한 이난영은 남편이 작곡한 노래를 부르면서 전성기를 보냈다. 6·25전쟁 중 남편이 실종된 후 5년 동안 가수...
안익태는 1930년대 총독부에서 한국인에게 발급하는 98매의 여권 중 하나를 받아 미국으로 건너갔다. 이후 안익태는 5년에 걸쳐 애국가를 완성했고, 애국가 악보는 미국에서 출판되자마자 일제의 금지 단행본 목록에 추가됐다.
안익태의 1930∼1933년 신시내티음악원 생활은 알려진 바가 없지만, 유씨는 해당 학교로부터 학적부와 성적표를 얻어내 새로운...
허나 경복궁 중건으로 전각들의 대부분이 헐려나가고, 일제시대 때 경성중학교와 총독부 관사가 들어서면서 400여년 전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지금은 아담한 모습으로 관람객들을 맞는 경희궁은 다른 큰 궁궐에 비해 비교적 관람객이 적어 여유롭게 볼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현재 경희궁 앞 서울역사박물관 1층 기획전시실에서 을 진행하고 있어...
독립운동가 안중근 의사와 인연이 있던 임국정은 1920년 1월 4일 간도 용정촌 동량어구에서 조선총독부의 15만원을 탈취하는데 성공했다. 임국정은 15만원을 갖고 엄인섭과 함께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로 넘어가 항일운동을 펼쳤다.
이에 일본 경찰은 이들을 잡기 위한 대대적 수사를 시작했다. 그러나 일본 경찰이 러시아에서 임국정과 엄인섭을 찾아냈을 때...
12월에 선보이는 1차 광화문 세트는 조선총독부 자리에서 다시 찾은 광화문을 요판화로 표현했다. 광화문 앞쪽 사거리에 대한민국 도로의 시발점을 알리는 도로원표까지 묘사해 우리나라의 과거와 현재, 미래를 연결하는 문이라는 의미를 담았다.
2차 백두산 천지 세트는 분단 70년의 아픔을 기억하고 우리가 지향해야 할 통일을 기억하기 위해 선택됐다. 3차...
1907년 7월 조선총독부는 조세 수탈과 민족문화 말살의 일환으로 ‘주세령’을 공포했다. 같은 해 8월 주세령시행규칙을 공포하고 9월부터는 강제집행을 시작했다. 이어 1916년 주세법을 공식 입법화하고 단속을 더욱 강화했다. 1917년에 이르러서는 급기야 집집마다 빚어 먹던 가양주를 전면 금지하기에 이른다.
이에 따라 전통주의 맥이 끊기고 일본에서 발 빠르게...
조선총독부가 쌀 배급제를 시작하면서 간판을 내려야만 했습니다.
아산은 곧바로 아산서비스공장을 열었지만 이 또한 쉽지 않았습니다. 애써 꾸민 공장엔 불이 났고, 늘 자금난에 시달렸습니다. 조선총독부는 공장 허가를 빌미로 몽니를 부렸죠. 결국 3년 만에 문을 닫았습니다. 두 번의 실패를 거치면서 아산은 아이러니하게도 ‘장사꾼’이 됐습니다. 성공하는 법과...
또 산케이 신문은 김 전 대통령 재임 중에 역사 바로 세우기의 하나로 서울에 있던 옛 조선총독부 청사가 철거되고 독도에 접안 시설이 건설된 것을 소개했다.
중국 언론들은 고인을 한국에서 반부패 변혁의 바람을 일으킨 대통령으로 평가했다. 중국신문망은 연합뉴스를 인용해 김 전 대통령의 서거소식과 이력을 조명하면서 그가 대통령 취임이후 반부패...
김 전 대통령은 취임 첫 해인 1993년에 국립박물관으로 사용하던 옛 조선총독부 건물을 해체해 경복궁을 복원하고, 새로운 국립중앙박물관을 국책사업으로 건립하라는 특별지시를 내렸다.
이에 문화부는 용산가족공원 4만5000평 규모의 부지에 1994년부터 7개년 계획으로 새로운 국립중앙박물관을 건립한다는 계획을 발표했다.
광복 50주년이 되는 해인 1995년...
산케이신문은 김 전 대통령이 재임 중에 역사 바로 세우기의 목적으로 서울에 있던 옛 조선총독부 청사를 철거하고 독도에 접안 시설을 건설했다고 소개했다.
요미우리신문은 ‘민주화를 요구하며 군에 저항’이라는 제목으로 김 전 대통령의 평전 형식의 기사를 보도에 눈길을 끌었다. 신문은 김 전 대통령이 과감한 행동력과 결단력으로 한국의 민주화에...
문민정부의 탄생, 대통령 집무실 모습, 세계 정상들과 기념 촬영 모형, 금융실명제 모형, 조선총독부 건물 철거, 변화와 개혁 등 내용을 갖추고 김 전 대통령의 업적을 기리고 있다. 1층 다른 방에 마련된 자료열람실에는 김 전 대통령 관련 기록이 담긴 서적 열람이 가능하다.
김 전 대통령 생가와 기록전시관은 작은 어촌 마을 아름다운 풍광과 함께 어우러져 있다....
그후 일제 강점기 시절 조선총독부 산하 통신국(1910년), 경성우편국 용산전화분국(1922년), 경성무선전신국(1923년)을 거치며 해방 후 대한민국 정부 수립과 함께 체신부(1948년)로 변경됐다. 이후 한국전기통신공사(1981년), KT(2002년)로 이어지며 대한민국 통신 역사의 명맥을 이어오고 있다.
이에 한성전보총국을 모태로 하는 KT는 1985년 통신 100주년 기념식에...
그 후 일제 강점기 시절 조선총독부 산하 통신국(1910년), 경성우편국 용산전화분국(1922년), 경성무선전신국(1923년)을 거치며 해방 후 대한민국 정부수립과 함께 체신부(1948년)로 변경됐다. 이후 한국전기통신공사(1981년), KT(2002년)로 이어지며 대한민국 통신 역사의 명맥을 이어오고 있다.
이에 한성전보총국을 모태로 하는 KT는 1985년 통신 100주년 기념식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