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점심식사 자리에서 선물로 받은 CD에는 오십 개의 ‘봄날은 간다’가 담겨 있다. 1953년 이 노래를 처음으로 부른 백설희부터 배호, 한영애, 심수봉, 조용필, 장사익, 개그맨 김보화에 이르기까지 누구 것을 들어도 다 몸에 감겨든다. 부른 이마다 장르, 음색, 리듬이 달라 같은 노래라는 느낌이 전혀 들지 않는다. 노랫말이 가슴으로 절절하게 스며들 뿐이다. 희대...
형형색색 꽃이 피니 곤충, 벌레들도 활발하게 움직인다. 향기에 취한 생명체들이 꽃으로 모여드는 것을 보니 봄은 꽃만의 천국은 아닌 듯싶다. 퇴근 후 편안한 옷차림으로 동네를 한 바퀴 도는데, 언제 심었는지 동대문구 한천로 가로수길에 이팝나무 꽃이 하얀 고봉밥처럼 탐스럽게 피어 있다. 갓 지어 내 기름기 자르르 흐르는 밥에선 김도 모락모락 나는 듯하다. 나무...
종이가 귀하던 시절이 있었다. 아버지는 담뱃갑 속 은박지를 모아 연습장을 만들어 주셨다. 화장실에선 손바닥 크기로 자른 신문지를 사용했다. 연말에 은행 등에서 달력을 선물받으면 반을 잘라 새 학년 교과서의 겉장을 정성껏 쌌다. 1970~80년대 귀한 게 어디 종이뿐이랴. 어머니는 저녁마다 구멍 난 양말을 꿰맸고 아버지는 몽당연필을 볼펜 끝에 끼워 주셨다. 다섯...
산을 오르는 것만큼 걷기를 좋아한다. 온몸으로 바람을 느끼며 천천히 걷다 보면 분노, 고뇌 등 온갖 감정의 찌꺼기를 날릴 수 있어서다. 숲길도 좋고 도심의 가로수 거리도 좋다. 자주 걷다 보니 이젠 자연의 작은 변화도 눈에 들어온다. 연둣빛 움을 틔우는가 싶던 나무가 어느 순간 녹색 잎으로 성장했다. 담록(淡綠)이 가장 고운 시기, 오월이다. 피천득은 수필 ‘5월’...
‘아파도 앓아 눕지 못하는/앉은뱅이 꽃/마음을 다해 태워도/신열은 향기로만 남는/뿌리 깊은 앉은뱅이 꽃/갈대밭 세상에서/숨어서 보일 듯 보이지 않는/키 작은 내 모양’
발가락 시인 이흥렬씨의 시 ‘앉은뱅이 꽃’이다. 뇌병변으로 몸이 마비된 시인은 왼쪽 발가락에 연필을 끼워 시를 쓴다.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는 게 오로지 발가락뿐이기 때문이다. 글쓰기를...
까치울역(7호선)은 ‘까치가 많은 마을’이라는 뜻의 ‘작동(鵲洞)’으로 불리다 우리말로 바뀌었다는 설과, ‘작다’는 의미의 순 우리말 ‘아치’가 ‘까치’로 변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노들역(9호선)은 수양버들이 울창하고 백로가 노닐던 옛 노량진을 ‘노들’이라고 부르던 데서 유래했다. 강이나 바닷목에서 나룻배가 서는 곳을 뜻하는 ‘나루’는 잠실나루...
고교 시절 서예반이라는 이유로 친구들의 연애편지를 대신 써 주었다. 또박또박 예쁜 글씨로 쓴 연애편지가 진심을 잘 전할 것이란 생각 때문이었다. 하지만 연애편지란 손발이 오그라드는 내용이 먹히는 법. 연애 한 번 못 해 본 여고생의 편지에 감동받을 남학생이 있을 리 만무였다. 실력 없는 목수가 연장 탓을 한다고 했던가. 아버지를 졸라 만년필을 샀다. 편지지에...
영어 블랙(Black)에 해당하는 우리말은 검다를 비롯해 까맣다, 시커멓다, 거무스름하다, 거무튀튀하다 등 다양하다. 그런데 표현이 풍부한 만큼 ‘거무티티하다’ ‘거무틱틱하다’ 등 잘못 쓰는 말도 있다. 이들 말은 존재하지 않으므로 아예 머릿속에서 버리자. 시나 노랫말에서 만나는 ‘푸르른’ ‘누르른’도 사실은 존재하지 않는 색깔이다. ‘푸르른’과...
이번 주말 싱가포르에서는 각국 정상과 고위 인사들의 ‘조문(弔問) 외교’가 펼쳐질 것이다. 싱가포르국립대학에서 거행되는 리콴유(李光耀) 전 싱가포르 총리의 국장(國葬)에 각국 정상은 물론 거물급 인사들이 참여할 것으로 알려졌다. 박근혜 대통령도 국장 당일 전용기편으로 출국해 조문할 예정이란다. 박 대통령이 해외 정상급 지도자의 장례식에 직접 참석하는...
표준국어대사전에 ‘배우자에게 만족하지 아니하고 몰래 다른 이성과 관계를 갖다’란 의미의 우리말은 ‘바람피우다’로 올라 있다. 즉, ‘바람피다’라는 말은 잘못된 표현이다. ‘바람피우다’는 한 단어이므로 붙여 써야 한다.
‘피다’는 동작이나 작용이 주어에만 미치는 자동사로 ‘피어’ ‘피니’ 등으로 활용된다. 꽃이 피었다, 형편이 피었다, 곰팡이가...
언니는 손윗사람을 부르는 순 우리말이다. 그런데 조선시대 유학자들은 훈민정음을 암글, 언문 등으로 비하하면서 언니 대신 한자말인 형(兄)을 썼다. 자연스럽게 언니는 신분이 낮은 계층이나 여자들 사이에서만 사용됐다. 이후 세월 속에서 태어나고, 변화·성장하고, 소멸하는 말과 글의 특성상 언니는 여자 사이에서 손윗사람을 뜻하는 단어로 굳어졌다.
하지만 남녀...
마지막으로 구멍이 뚫린 물건 위에 국수나 채소 따위를 올려 물기를 뺀다는 의미의 우리말은 ‘밭치다’이다.
1918년 이화학당 고등과 교비생으로 입학한 유관순 열사는 1919년 3ㆍ1운동 직후 일제 총독에 의해 학교가 휴교하자 즉각 고향으로 내려가 만세운동을 이끌었다. 집결지는 아우내 장터로, 현재 천안 독립기념관 옆의 병천(竝川)이다. 아오네, 아우네 등으로 잘못...
“대체 명절은 왜 있는 거야!” 설 연휴 집에 다녀온 친구가 모임에 나와 투덜댄다. 잘나가는 커리어우먼인 그가 충청도 시골 마을 어르신들 사이에선 처량하고 궁상맞은 ‘노처녀’로 전락해 애물단지 취급만 받았단다. 노처녀, 올드미스…. 언제 적 말인가. 그러고 보니 언제부턴가 결혼적령기가 없어졌다. 여자에게 나이는 물론 결혼 여부를 묻는 것조차도 실례가 돼...
작다는 뜻의 순 우리말 ‘아치’가 시간이 흐르면서 ‘까치’로 음이 변한 것이다. 따라서 까치설날은 ‘작은 설날’, 즉 설날 전날인 섣달그믐을 뜻한다. 까치설날 집안 어른들께 세배를 드리는 풍습이 있다. 이를 ‘묵은세배’라고 한다. 까치설날, 섣달그믐, 묵은세배는 하나의 단어이므로 반드시 붙여 써야 한다. 기자도 어린 시절 작은 설날인 까치설날에 설빔을...
고개 중 가장 넘기 힘든 고개는 보릿고개다. 젊은층은 웬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 이야기를 하냐고 콧방귀를 뀌겠지만 불과 40~50년 전 이야기다. ‘보릿고개가 태산보다 높다’는 말에는 배고픔의 설움이 진하게 배어 있다. 자식들을 배불리 먹이지 못한 것은 지금껏 우리 부모들의 가슴속에 한으로 남아 있다. 꽁보리밥도 부족하던 시절 방귀는 왜그리 시도 때도 없이 잘...
이럴 경우엔 과감하게 한자말을 버리고 대신 순 우리말 ‘들보’나 ‘기둥’을 쓰자. 훨씬 부드럽고 편안하게 느껴진다.
박근혜 정부가 역점을 두고 있는 사업 가운데 하나가 성폭력 근절이다. 그런데 이를 비웃기라도 하듯 사회 곳곳에서 성추문이 끊이지 않으니 참으로 딱한 노릇이다. 결과가 뻔한데도 불 속으로 뛰어드는 불나방처럼 성희롱을 저지르는 이유가 참으로...
순 우리말끼리의 합성어 중 뒷말 첫소리가 된소리로 날 경우엔 사이시옷을 넣어야 한다. 순대와 국 둘 다 순 우리말이고, ‘순대꾹’으로 발음되므로 사이시옷 규정에 따라 ‘순댓국’이라고 해야 올바르다. 선짓국, 감잣국, 뭇국 등도 마찬가지다.
매콤하고 쫄깃쫄깃한 식감으로 사람들의 입맛을 사로잡는 ‘쭈꾸미 볶음’도 바른 말이 아니다. 주꾸미 볶음이라고 해야...
신문사 편집국만큼 분위기가 빠르게 변한 것도 드물지 않나 싶다. 기자가 언론에 발을 처음 내디딘 1990년대 초중반은 컴퓨터가 막 도입된 시기다. 원고지에 기사를 써 왔던 선배들은 당시 컴퓨터의 매력을 크게 느끼지 못했다. 특히 퇴근 후 술로 만신창이가 되는 날엔 두껍고 무거운 노트북을 잃어버려 회사 총무과에 기기값을 물어낸 선배도 여럿이다.
기사는...
◇ [뉴욕인사이드] 현대차, 시장이 먼저다
민태성 뉴욕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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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포츠
박성희 한국외대 국제스포츠레저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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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경아의 라온 우리말터]품격을 높이는 말말말
편집부 교열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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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자수첩] ‘신뢰’ 찾아볼 수 없는 하나·외환銀 통합작업
김민지 금융시장부 기자...
그런데 안타깝게도 오늘날 우리 말과 글은 이와 정반대의 방향으로 가고 있다. 조현아 전 대한항공 부사장이 저지른 ‘슈퍼갑질’ 이후 그가 사무장에게 호통쳤던 ‘너 내려’가 지난해 하반기를 달군 유행어로 떠올랐다. 재벌가 2·3세의 인성과 경영 능력을 도마 위에 올린 이 사건 이후 조씨를 풍자하는 각종 패러디물도 쏟아져 나왔다.
도박장에서나 쓰일 법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