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경아의 라온 우리말터] 이팝ㆍ아까시 꽃향기 맡으며

입력 2015-05-15 13: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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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형색색 꽃이 피니 곤충, 벌레들도 활발하게 움직인다. 향기에 취한 생명체들이 꽃으로 모여드는 것을 보니 봄은 꽃만의 천국은 아닌 듯싶다. 퇴근 후 편안한 옷차림으로 동네를 한 바퀴 도는데, 언제 심었는지 동대문구 한천로 가로수길에 이팝나무 꽃이 하얀 고봉밥처럼 탐스럽게 피어 있다. 갓 지어 내 기름기 자르르 흐르는 밥에선 김도 모락모락 나는 듯하다. 나무 이름도 꽃이 흰 쌀밥 같아 쌀밥을 뜻하는 ‘이밥’에 ‘나무’를 붙여 이팝나무가 되었다는 설이 전해진다. 밥 한 그릇도 배부르게 못 먹던 가난한 시절의 이야기다. 이팝나무 꽃이 만개하는 5월은 1960~70년대엔 보릿고개였다. 그 시절 부모들은 엄마 품에서 빈 젖을 빨다가 굶어 죽은 아기를 묻고, 그 근처에 이팝나무를 심었다. 살아서 먹지 못한 쌀밥을 죽어서 눈으로라도 실컷 먹으라는 애달픈 마음을 전한 것이다.

이팝나무는 입하(立夏) 무렵에 꽃이 피므로 ‘입하목(立夏木)’이라고 부른 것이 이팝나무로 변했다는 설도 있다. 그런데 입하목보다는 이팝나무에 더 마음이 이끌린다. 교복을 입은 여학생들이 지나가면서 “꽃이 팝콘 같다”며 재잘거린다. 먹을거리가 풍족한 세상을 살아가는 아이들에겐 흰 쌀밥보다 팝콘이 먼저 떠오른 것이 당연하다 싶다. 그런데 이 풍성한 꽃을 보면서 알 수 없는 슬픔이 밀려드는 이유는 뭘까. 콧가에 은은하게 와 닿는 꽃향기가 밥이 익어 가는 냄새 같아서였으리라.

내친김에 배봉산까지 올랐다. 서울시립대 뒤쪽에 자리한 나지막한 이 산은 저녁 산책 코스로 그만이다. 산 입구에 들어서자 ‘아름다운 아가씨 어찌 그리 예쁜가요~’로 시작하는 CM송이 떠올랐다. 온 산에 아까시 꽃이 흐드러지게 피어 향기가 진동했기 때문이다. 바람이 불 때마다 달콤한 꽃향기가 코끝을 간지럽힌다. 어린 시절엔 아까시 꽃이 만개하면 친구들과 떼를 지어 다니면서 탐스러운 가장귀를 꺾어서 꽃을 따 먹곤 했다.

그런데 아까시나무가 뭐지 하고 의문을 갖는 독자들이 많겠다. 동요 ‘과수원 길’의 노랫말 ‘동구 밖 과수원길 아카시아 꽃이 활짝 폈네…’로 익숙한 아카시아나무가 사실은 아까시나무다. 둘 다 콩과에 속하지만 아카시아나무는 상록교목으로 오스트레일리아를 중심으로 열대와 온대 지역에서 자라며 노란색 꽃이 핀다. 우리나라 산야에선 보기 힘든 나무다. 아까시나무는 북아메리카가 원산지로 지금 전국을 꽃향기로 물들이는 바로 그 나무다. 아까시나무는 학명의 종소명이 슈도 아카시아(pseudo acasia)로, 여기서 슈도는 가짜라는 뜻이다. 즉, ‘가짜 아카시아’라는 의미인데 우리나라로 들어와 진짜 아카시아가 되어 버린 셈이다.

아카시아란 이름이 주는 친숙함 때문에 이 이름을 버리기는 못내 아깝다. 표준국어대사전에도 아카시아는 ‘아까시나무’를 일상적으로 이르는 말로 떡하니 올라 있다. 그렇다 하더라도 이 이름의 주인은 따로 있으니 아까시나무로 부르는 것이 올바르다. 다소 낯설게 느껴지더라도 아까시나무를 자꾸 입 밖으로 부르다 보면 이내 친근해질 것이다.

향기는 어둠 속에서 더 짙어지는 법. 아까시 꽃향기에 숨이 벅차오를 때쯤 산 중턱에 앉아 두런두런 이야기꽃을 피우는 노부부의 정겨운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향기는 자연뿐만 아니라 사람 혹은 대화에서도 뿜어져 나온다. 그렇다면 향기 나는 삶은 어떤 것일까. 법정스님은 산문집 ‘아름다운 마무리’에서 이렇게 정의했다. “사람이 향기로운 여운을 지니려면 주어진 시간을 값 없는 일에 낭비해서는 안 된다. 쉬지 않고 자신의 삶을 가꾸어야 한다. 그래야 만날 때마다 새로운 향기를 주고받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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