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산군은 진성대군의 최후의 일격에 맞선 뒤, "난 네가 왕이 되길 바랐다"면서 "내가 그린 복수는 네가 왕위에 오르는 거였다"라고 말하며 광기를 보였다.
그날 밤 장녹수(손은서 분)는 연산군의 거처를 찾았고, 주상의 손으로 직접 죽여달라고 간청한다. 이에 연산군은 비녀로 장녹수를 살해한 뒤, 울부짖었다.
같은 시각 박원종의 수하들은...
사기 그릇 파는 것을 생업으로 하였는데, 충혜왕이 보고 총애하였다. 1342년 은천옹주로 책봉되니 사람들이 ‘사기옹주’라고 별명을 지어 불렀다.
천민 출신이 어떻게 왕의 후궁이 될 수 있었을까? 가장 큰 이유는 경제에 대한 충혜왕의 남다른 관심 덕분이었다. 원 간섭기에는 나라에 돈이 많이 필요했다. 원에 바쳐야 하는 막대한 공물, 수시로 오가는 원의 사신 접대와...
51년생 : 왕이 선정을 베풀 듯이 자식이나 아랫사람에게 베풀면 길하다.
오늘의 운세 - 용띠
반가운 사람을 만나니 한 번은 좋고 또 한 번은 흉하게 된다.
76년생 : 처음 만나는 사람이나를 돕는 사람이라 잘 보고 결정하라.
64년생 : 오전에 꼬인 일을 오후에 귀인이 나타나서 완전히 해결해 준다.
52년생 : 모든 괴로움에서 털고 일어나 다시 힘을 모아야 한다.
40년생...
진성대군은 "죽어서도 채경이와 함께 하겠다"라는 마음을 새기고, 채경은 진성대군에게 "왜 왕이 되려 하느냐"라고 만류한다.
채경은 의문의 괴한들에게 납치를 당하고, 이후 연산군에게 붙잡혀 간다. 진성대군은 이와 같은 사실에 분노해 연산군에게 칼을 겨누고, 채경에게 "낙향하자"라고 말한다. 방송은 13일(오늘) 밤 10시.
진성대군은 지켜주지 미안함에 고개를 들지 못하고, 선호는 "빨리 왕이 되시라"라며 결의를 다진다.
신채경은 진성대군 몸에 난 상처에 의문점을 품고, 연산군이 건넨 열쇠를 들고 전당포로 향한다.
몰래 전당포에 들어간 신채경은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했다고 왕에게 말하겠다"라고 말했지만, 밀실에서 반정 뒤 제거해야 할 관료들의 명단을 보고...
문의왕후(文懿王后)는 영화부인(寧花夫人)이라고도 하는데, 신라 제47대 왕인 헌안왕(憲安王·재위 857~861)의 맏딸이다. 제48대 경문왕(景文王·재위 861∼875)의 왕비이자, 제49대 헌강왕(憲康王·재위 875∼886)과 제50대 정강왕(定康王·재위 886~887), 제51대 진성여왕(眞聖女王·재위 887~897)의 어머니이다.
헌안왕에게는 두 명의 딸만 있었고, 왕위를 물려줄 아들이 없었다....
같은 시각, 진성대군(연우진 분)은 불길한 기운 속에 "내가 밀지를 찾겠다"라고 말한다.
신채경(박민영 분)은 행복한 결혼 생활을 꿈꾸고, 진성대군은 우렁 각시들과의 반란 계획을 쉽사리 털어놓지 못 한다.
연산군의 의심은 극에 달해 전당포가 습격 당하고, 부친의 고문 사실을 안 선호(황찬성 분)는 진성대군에게 "어서 왕이 돼 달라"라고 간청한다.
지천사는 하늘을 가르는 절이라는 뜻으로, 하늘에서 별이 떨어지거나 변고가 있을 때 왕이 친히 제례를 지낸 곳이다. 이 터가 몇 백 년 전부터 귀한 손님을 맞이하고 대접하는 장소였다는 역사 기록이 인상적이었다”고 말했다.
그는 “또한 현재 스파, 피트니스, 그랜드볼룸이 위치한 별관은 1932년 이상이 설계한 소공동의 ‘낙랑파라’라는 다방이 있던 자리로...
벽화는 신라 제21대 왕인 소지왕(炤知王·재위 479∼500) 대의 인물이다. ‘삼국사기’에는 파로가 딸 벽화를 소지왕에게 바친 일화가 나온다. 소지왕은 비처왕(毗處王)이라고도 하였는데, 자비왕의 맏아들이다.
소지왕이 재위 22년(500) 가을 9월에 날이군(捺已郡·현재 경북 영주)에 행차하였다. 당시 날이군은 신라의 최북방 요충지였다. 소지왕은 왕의 통치행위의 일환으로...
불이 떨어진 임사홍과 장녹수(손은서 분)는 진성대군을 불러들일 미끼로 채경을 이용하기로 하고, 저잣거리에 채경을 매달고 제 발로 찾아오기를 기다린다.
연산군은 진성대군이 나타나지 않는 이유가 자신을 10년 전 진성대군 죽음의 배후라고 의심하기 때문이라며 한탄하고, 진성대군은 채경을 잊고 오로지 왕이 되기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걸겠다고 다짐한다.
문정왕후는 명종에게 “그대가 왕이 된 것은 모두 우리 오라버니와 나의 공이다”고 강조하면서 정치적 지분을 당당하게 요구했다. 그리하여 8년간 수렴청정을 하면서 정치 일선에 나섰다.
명종이 즉위하자마자 대윤을 포함한 반대파를 대대적으로 숙청해 정국을 확고하게 장악했다. 을사사화(乙巳士禍)였다. 모든 것을 정치적으로 판단한 문정왕후는 과단성 있는...
정조가 진종(眞宗·효장세자, 영조 맏아들)의 양자로 왕이 되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혜경궁의 마음을 더 찢어놓은 것은 바로 친정 식구들의 고초였다.
1776년 3월 10일, 정조는 즉위하자마자 어머니 칭호를 ‘혜경궁’으로 높였다. 3월 20일에는 아버지에게 ‘장헌(莊獻)’이라는 시호를 올렸다. 그리고 아버지 죽음에 대한 책임을 신하들에게 묻기 시작했다. 정조에게...
충렬왕이 태자 시절인 1260년(원종 1) 태자비로 간택되었다. 아버지는 종친인 시안군(始安君) 왕인(王絪)이다. 1274년(원종 15) 태자비였던 정신부주에게는 청천벽력과도 같은 일이 일어났다. 전쟁 종식을 위하여 몽골에 들어간 남편이 원세조의 딸 제국대장공주(齊國大長公主)와 혼인을 한 것이다. 혼인한 지 14년 만에 두 번째 왕비를 얻은 셈인데, 고려 왕실은 애초에...
제국대장공주(齊國大長公主·1259~1297)는 고려 제25대 왕인 충렬왕(1236~1308)의 왕비이다. 이름은 홀도로게리미실(忽都魯揭里迷失)이며, 원나라 세조의 딸로서 고려에 시집온 최초의 원나라 공주이다. 1274년(원종 15) 충렬왕이 세자로 원나라에 있을 때 혼인하니 공주 나이 16세, 충렬왕 나이 39세였다. 이 해에 원종이 죽어 함께 귀국하자 사람들이 “백년 전쟁 끝에 다시...
경창궁주(慶昌宮主) 유(柳)씨는 고려 제24대 왕인 원종(1219~1274)의 제2비이다. 아버지는 종친인 신안공 왕전(新安公 王佺)이며, 어머니는 희종(熙宗)의 딸인 가순궁주(嘉順宮主)이다. 1244년(고종 31) 원종이 태자였던 시절 태자비로 간택되었다.
원종은 1235년(고종 22) 태자로 책봉되어, 그해 최이(崔怡)의 외손녀인 김약선(金若先)의 딸[사후 순경태후(順敬太后)로 추존]을...
내가 왕이 되겠다"라고 말해 일촉즉발의 갈등 상황을 예고했다.
앞서 연산군은 진성대군이 서노(최민영 분)라는 노비의 집을 자주 드나든다는 첩보를 들은 뒤, 서노의 부친이 선왕의 밀지를 지니고 있는 사관이라고 단정 짓는다.
그를 잡아들인 연산군은 "진성대군이 왜 네 아들과 집에 함께 있는 것이냐"라고 다그쳤고, 이에 서노의 부친은...
중국의 군현이므로 엄밀히 말하면 보과부인의 아버지가 대방의 실질적 통치자라고 해도 왕이라는 표현은 맞지 않는다.
그런데 ‘대방왕’이라고 한 것은 대방군이 중국 본토와 완전히 연결이 끊어진 채 토착화되면서 중국의 ‘소국’과 같은 형태로 운영되고 있었기 때문으로 보고 있다.
대방 출신인 보과부인이 백제로 온 것은 백제와 대방이 혼인동맹을 형성했기...
설요의 묘지명(墓誌銘)에는 신라왕 김씨의 후손인데 신라왕이 특별히 사랑하는 아들에게 ‘설’국을 식읍(食邑)으로 봉해주고 설을 성씨로 삼게 했다고 하였다. 설승충은 태종무열왕의 아들인 김인문(金仁問)과 함께 당나라로 건너가 당에서 좌무위장군(左武衛將軍)이 되었다. 좌무위장군은 신라의 태종무열왕이 즉위 전 당나라에서 받았던 것으로 외국인에게는...
고국원왕은 고구려 제15대 미천왕(美川王·재위 300~331)의 아들로 314년(미천왕 15)에 태자로 책봉되었으며, 331년 2월 미천왕이 세상을 떠나면서 즉위하였다. 주씨는 미천왕 대에는 행적이 전혀 드러나지 않고, 아들 고국원왕이 즉위한 이후 왕모 주씨로 사료에 그 존재가 언급되고 있다.
주씨는 왕실 여성으로 생활에 빈궁을 겪지는 않았지만 삶이 평탄하지는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