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랫말의 첫 구절을 따서 ‘공무도하가(公無渡河歌)’로도 불리는 이 노래의 창작과 유포에는 ‘여옥’이라는 여성이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남편은 곽리자고로, 배와 관련된 일을 하는 진졸(津卒)이었다. 그 외 부모나 가족관계는 알 수 없다. 출신은 직예성 조선현 사람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에 대해 한치윤은 낙랑군이 설치되었던 조선현으로 이해하여 지금의...
블라디보스토크의 여학교에서 사회주의를 공부하며 붙임성 있고 쾌활한 여성으로 잘 자랐다. 16세에 스탄케비치의 아들과 결혼하여 아들을 낳았으나, 남편이 방탕한 생활을 하여 결국 이혼했다.
재혼하여 두 아이의 엄마가 되었으나, 1914년 가족을 떠나 조선인, 중국인 노동자를 대규모로 고용하는 우랄 지방 벌목장의 통역관이 되어 노동자들의 권익을 보호하는 데...
1907년에 쓴 ‘동생의 죽음’이란 시는 육당 최남선의 신체시 ‘해에게서 소년에게(1908년)’보다 1년 먼저 나온 국문자유시란 점에서 여성문학사뿐만 아니라 국문학사에서 이채로운 존재로 주목되고 있다. 또한 일엽은 3·1운동 때 자기 집 지하실에서 전단을 등사·배포하였고, 이후 1920년 3월 한국 최초의 여성잡지 ‘신여자’를 나혜석, 신줄리아와 함께 창간하여...
1918년 3월 제2호에 발표한 단편 ‘경희’는 여성적 자아의 발견을 주제로 한 소설로, 본격적인 여성 소설 1호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졸업 이후 귀국한 그는 함흥의 영생중학교와 서울 정신여학교 등에서 미술 교사로 활동했다. 1919년 3·1 만세운동에 이화학당 교사 신마실라, 김활란 등과 함께 참가했다. 그 일로 5개월간 옥고를 치렀다. 이미 일본 유학 시절 2·8...
만주 요녕성 통화현으로 가 서로군정서에 가입하고, 농촌에 10여 개의 교회와 20여 개의 여자교육회를 설립하여 청년과 여성들에게 민족애와 항일정신을 가르쳤다. 1922년 국내에 들어와 군자금을 모금하고, 1925년에는 사이토 마코토(齋藤實) 조선 총독 암살을 기도하는 등 남성 못지않은 항일 투쟁을 감행했다. 상하이임시정부의 안창호, 김동삼 등 투옥된...
한국 최초의 여성 치료 병원인 보구여관에서 통역과 병원 일을 하던 그는, 언청이를 수술해 예쁜 얼굴을 찾아준 의사를 보며 의사가 될 것을 결심했다. 의학 공부를 하기 위해 미국을 가려면 남편이 필요했던 그는 여의사 홀의 소개로 만난 박여선과 1893년 5월 기독교 방식으로 결혼하였다. 이듬해 12월 남편과 함께 미국으로 가 뉴욕 리버티의 공립학교에서 의과대학...
간도에서 청년교양운동 교사로 운동가로 헌신하다 귀국 후 여성운동에 뛰어들어 남편과 함께 서울청년회계의 청년당대회에 참여하였다. 1923년 남편이 간도 용정에 동양학원을 설립하여 민족교육을 실시하는 한편, 항일선전문을 배포하고 폭탄으로 일제 기관의 파괴를 계획한 데 동참하였다가 체포되었으나 임신 중이었으므로 기소유예로 풀려났다.
여성의식...
윤희순(尹熙順, 1860~1935)이 주도한 안사람 의병단은 의병을 돕기 위해 안사람 모임을 결성한 데서 비롯하였으나 남성 의병과 같이 여성 의병 출정을 하였다. 여기에 참가한 30여 명의 여성 의병이 근대적 의식을 가진 여성단체였다고 하기는 어려우나 일제 침탈의 위기에 구국항쟁의 커다란 흐름에 여성도 한몫을 감당해야 한다는 의식만큼은 투철했다.
한국 최초의...
1928년 1월 근우회(槿友會)의 평양지회를 조직하고 평양근우회 회관도 짓는 등 주도적으로 활동하다, 1930년에 중앙집행위원장으로 선출되었다. 같은 해 12월에는 여성실업장려회를 조직하여 여성의 경제적 각성과 취업 확대에도 힘썼다. 1934년 9월에는 동아일보사 주최로 그의 회갑잔치가 열렸다.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그는 1924년 5월 정종명, 허정숙 등과 함께 조선여성동우회를 조직, 집행위원으로 선임돼 중심 인물로 활동하였다. 또 조선청년총동맹 창립대회에 참가하였고, 고려공산청년회 중앙 후보위원으로, 1926년 4월 정우회에서 활동하다가 체포되었으나 증거 불충분으로 곧 석방되었다. 1925년 1월 창립된 경성여자청년동맹 집행위원으로 선임되었고 1927년 5월 창립된...
조선시대에 모든 남성이 공유할 수 있는 성(性)이 있었으니 바로 기녀였다. 이매창(1573~1610)은 전라도 부안에서 아전 이탕종의 딸로 태어났다. 계유년에 태어나 계랑이라는 애칭으로 불렸다. 매창이 기생이 된 이유는 자세히 기록돼 있지 않으나 어머니가 기생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매창은 어릴 때 아버지에게 글을 배워 시(詩)와 문장을 잘 지었다. 거문고도 잘 타고...
이씨의 죽음은 사후에 잊히지 않았다. 강화도에서 최초로 순절한 여성으로 역사에 남았다. 40여 년이 지난 1681년(숙종 7년)에 국가로부터 의로운 죽음으로 공인받아 정려를 받았다. 반면 남편 윤선거는 일생을 근신하면서 살았다. 윤선거는 재혼하지 않았으나 아버지 명으로 첩을 들여 세 명의 아들을 두었다.
그 대신에 ‘이기심성설(理氣心性說)’, ‘극기복례위인설(克己復禮爲仁說’ 같은 성리학에 관한 독창적인 논문이나 여성 전기, 성현의 인물론, 발문(跋文), 제문(祭文) 등 남성의 글짓기 영역으로 알려진 주제로 가득하다. 윤지당은 ‘천륜’을 다하지 못한 대신 사회적 유전자를 남겼다. 윤지당의 글은 퍼져나갔고, 같은 길을 가고자 하는 후배 여성들에게 걷고 싶은...
원경왕후는 혼인 후 10여 년간 이성계가 새 왕조를 창건하는 과정을 가까이에서 지켜본 여성이었다. 원경왕후는 이 경험을 자양분 삼아 남편과 한뜻으로 태조 이후의 대권을 향해 내달렸다.
원경왕후는 목숨을 위협당하는 상황도 마다하지 않았다. 태종이 정도전을 제거할 때, 남편이 화를 당했다고 오인한 원경왕후는 함께 죽을 각오로 현장으로 향했다. 나중에 정도전이...
신정왕태후 황보씨(?~983)는 고려 태조의 제4비다. 황해도 황주 출신으로 아버지는 태위 삼중대광 충의공(太尉三重大匡忠義公) 황보제공(皇甫悌恭)이다. 태후는 태조가 즉위한 초기에 혼인한 것으로 보인다. 즉위 당시 태조의 나이는 42세. 그녀는 20세 미만으로, 둘은 20년 이상 나이 차이가 났다고 봐야 한다.
그녀의 출신지인 황주는 신라시대 패강진이 있던 평주(황해도...
장화왕후(생몰년 미상) 오씨는 고려 태조의 두 번째 왕비이자, 고려 제2대 왕 혜종의 어머니이다. 고향은 나주의 목포(현재의 나주시 영산동 소재 영산포)이며, 할아버지는 부돈(富伅), 아버지는 다련군(多憐君)이다.
태조와 장화왕후의 만남은 한 편의 드라마이다. 태봉국의 수군 장군으로 목포에 내려온 왕건이 무지개를 좇아갔더니 시냇가에서 왕후가 빨래를 하고...
간신(奸臣)의 사전적 의미는 ‘간사(奸邪)하고 간악(奸惡)한 신하로, 임금에게 능력이 아닌 아첨으로 권력을 얻고 그 권력을 이용하여 자신의 재물과 지위를 높여가는 데만 주력하는 자들’이라 되어 있다. 중국의 역사를 보면 진시황 대의 환관이었던 조고(趙高)가 있었고, 후한 대에 이르면 최근 우리 귀에 익숙해진(?) 십상시라 불리던 열 명의 환관이 존재했다.
오백 년...
신혜왕후 유씨(생몰년 미상)는 태조의 제1비로 정주(貞州: 황해도 개풍군) 출신이며 삼중대광(三重大匡) 유천궁(柳天弓)의 딸이다. 유천궁은 고을 사람들이 ‘장자(長者)’라고 불렀다는 데서 큰 부자였음을 알 수 있다. 해상 활동을 통해 세력을 키운 호족으로 보인다. 정주는 개성과 가까울 뿐 아니라 예성강과 서해를 통해 교역에 유리한 지역이었다.
태조가 20대 때...
그리고 고려 당대에는 숭배도 있었을 것이나 조선왕조에 들어와 음사의 배척 및 고려왕실에 대한 격하 등과 맞물리면서 그녀에 대한 신성화 신앙화도 점점 엷어졌을 것으로 보인다.
저서 ‘고려의 혼인제와 여성의 삶’ ‘고려와 국방문화’, 논문 ‘고려 내직제의 비교사적 고찰’ ‘고려말 열녀 사례 연구’
◇미모가 출중했던 필부의 아내 = 도미부인은 기록을 찾기 힘든 백제의 여성이다. 원래 백제 여성에 대한 기록은 드문 편인데, 그나마 행적이 찾아지는 여성도 이름이 남아 있지 않은 경우가 많다. 도미부인 역시 마찬가지이다. 도미부인이라고 부르지만 도미는 남편의 이름으로, 편의적으로 부르고 있을 뿐이다. 남편인 도미는 정치권에 있는 대귀족은 아니었다. 그렇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