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복싱 세계 8대 기구 통합 챔프 김주희…대전료 없어 챔피언 박탈 위기

입력 2013-04-02 13: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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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3 때 복싱 입문 국내 1호 여자복서·세계챔프…WBC 챔프 타이틀 획득 ‘그랜드슬램’ 최종 목표

▲세계 8대 기구 통합 챔피언 김주희. 그녀는 기적의 여전사다.

“땡”

경기 시작을 알리는 종이 울리자 치열한 난타전이 이어졌다.

두 선수는 피범벅, 땀범벅이다. 둘 중 한 명은 쓰러져야 경기가 끝날 것 같다. 처절한 몸싸움, 주먹싸움은 계속됐다. 두 선수의 얼굴은 이미 일그러질 대로 일그러졌다.

“땡! 땡! 땡!”

드디어 경기 종료를 알리는 종이 울렸다. 이것으로 처절한 싸움은 끝이 났다. 심판 판정만을 남겨둔 상황이다. 채점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잠시 후 심판은 열여덟 살 소녀의 손을 들어 올렸다. 세상의 중심이 된 소녀는 김주희(27ㆍ거인체육관)다. 그는 사각의 링 위에서 눈물을 쏟아내며 기쁨을 만끽했다. 그리고 드라마 같았던 과거가 파노라마처럼 스쳐지나갔다.

지난 2001년. 서울 영등포의 문래중학교 3학년에 재학 중이던 소녀 김주희의 어린 시절은 처참했다. 견디기 힘든 배고픔과 싸우는 일이 일상이었다. 먹을 것이 없어 구멍가게에서 빵을 훔쳐 끼니를 해결하기도 했다. 어머니는 지긋지긋한 가난을 이겨내지 못해 두 딸을 두고 집을 나갔다. 엎친데 엎친 격으로 아버지는 뇌출혈로 쓰러졌다. 남겨진 가족은 언니뿐이었다. 졸지에 노숙자신세가 된 자매는 지긋지긋한 가난에서 벗어나기 위해 복싱체육관을 찾았다.

▲혹독한 가난을 이겨낸 불멸의 여자복서. 그러나 대전료가 없어 챔피언 박탈 위기에 몰렸다.

그때부터 복싱체육관은 소녀 김주희의 집이자 학교이자 놀이터가 됐다. 국내 여성복서 1호는 그렇게 탄생했다. 소녀 김주희의 목표는 오직 하나, 세계챔피언이었다. 그러나 그것도 순탄 치 않았다. 배고픔으로 인해 많은 운동량을 소화해낼 수 없었다. 체육관 월회비도 내지 못했다. 그렇다고 마냥 신세만 지고 있을 수는 없었다. 그래서 없는 시간 쪼게며 아르바이트를 했다. 먹는 것도 잠자는 것도 포기했다. 그것만이 살길이라고 생각했다. 그저 정신력 하나로 버텼다.

그러던 소녀 김주희에게 기회가 찾아왔다. 2003년 복싱 입문 2년 만에 한국챔피언이 됐고, 1년 뒤 세계챔피언의 문을 두드렸다. 지난 2004년 12월 경기 성남에서 열린 여자복싱 IFBA 주니어 플레이급 세계챔피언 결정전이다. 당시 세계랭킹 1위였던 소녀 김주희는 멜리사 세이퍼(세계랭킹 2위ㆍ미국)를 상대로 압도적인 경기를 펼치며 챔피언 벨트를 차지했다.

멜리사는 어릴 적부터 천재복서로 주목받던 미국의 기대주였다. 국내 언론은 김주희의 승리를 점치지 않았다. 그저 어려운 경기가 될 것이라는 예상뿐이었다. 그러나 김주희는 두 주먹으로 세계복싱 역사를 새로 썼다.

이후 김주희는 승승장구했다. 그의 강펀치는 주저함도 망설임도 없었다. 그의 강펀치 앞에선 누구라도 링 위에서 온전하게 걸어 나갈 수 없었다. 그러면서 무려 11개 기구(WBAㆍIFBAㆍWIBA 등)의 챔피언 벨트를 휩쓸었다.

▲오는 6월까지 방어전을 치르지 않으면 8개의 타이틀을 전부 박탈 당하게 된다.

그러나 그의 마음은 아직도 한겨울만큼 춥다. 타이틀 방어전을 치러야 하지만 후원자(기업)가 없어 경기를 해보지도 못한 채 챔피언 박탈 위기에 몰렸기 때문이다. 11개 기구 타이틀 중 IFBA와 WBA 타이틀은 이미 박탈당했다. 이제 남은 타이틀은 8개다. 1년에 2회 이상 방어전을 치러야 하지만 대전료 마련은 하늘의 별따기다. 김주희는 6월 말까지 방어전을 치러야 한다. 남은 기간은 2개월여다. 그때까지 스폰서를 구하지 못하면 피와 눈물로 지켜낸 8개 타이틀을 모두 잃게 된다.

국내 프로복싱은 수년 전부터 침체국면을 면치 못하고 있다. 챔피언이 되더라도 스폰서 구하기는 하늘의 별따기다. 타이틀 방어전을 위해서는 약 2억원이 필요하다. 지난해 12월 열린 타이틀 방어전에서는 약 1억5000만원을 후원받았고, 나머지 5000만원은 김주희와 체육관에서 부담하며 간신히 방어전을 치렀다.

후원금에는 김주희의 연봉도 포함돼 있어 경기 후에도 후원금을 쪼개가며 생활을 해야 한다. 챔피언이 됐어도 겨울만큼 춥게 느껴지는 이유다. 지금까지는 중부대학교와 완도군청, 우리투자증권, 한국가스공사, 한화, 카파 등으로부터 도움을 받았다.

주변에서는 그를 안쓰러운 눈길로 바라볼 뿐이다. 척박한 환경에서 모진 시련을 이겨내며 기적과 같은 결실을 맺고 있지만 알아주는 사람은 거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김주희는 다르다. “어차피 취미로 시작한 운동이 아니다. 어떤 일이든 남들만큼만 하면 정상에 오릴 수 없다. 정상을 밟고 싶었고, 그를 위해 열심히 노력했을 뿐이다”라고 밝혔다.

▲그의 마지막 목표는 WBC 챔피언에 올라 그랜드슬램 달성하는 것이다.

김주희는 또 “나는 천재가 아니다. 복싱에 소질이 있었던 것도 아니다. 그저 살기 위해서 샌드백을 두들겼다”며 “앞으로 남은 시간 스폰서 문제는 하늘에 맡기고 훈련에만 몰두하겠다”고 말했다.

때로는 환경이 원망스럽기도 하다. 모든 나라가 한국과 같지는 않기 때문이다. 독일, 일본, 멕시코, 아르헨티나 등 일부 국가에서는 프로복싱이 인기스포츠다. 그만큼 대전료가 높고 스폰서 유치도 쉽다.

“이번 방어전도 무사히 치를 수 있을까?”

김주희의 머릿속에는 하루에도 몇 번씩 이런 생각이 스치고 지나간다. 미친 듯이 샌드백을 두들기다가도 힘이 빠진다. 서글픈 마음에 서로의 얼굴만 쳐다보며 하루를 보낼 때도 있었다.

그럴수록 김주희는 독사가 된다. 오전 6시 로드워크(13㎞)로 하루 훈련을 시작하는 김주희는 오후 1시 헬스ㆍ요가, 오후 6시30분부터 11시까지 기술훈련을 이어간다. 하루 종일 빈틈없이 운동에만 전념하는 셈이다.

무려 14년간 김주희를 지도해온 정문호 감독은 “복싱은 남자들도 하기 어려운 운동이지만 주희는 웬만한 남자들보다 잘했다”며 “14년 동안 운동을 하면서 단 이틀밖에 쉬지 않았을 정도로 성실한 태도가 지금의 김주희를 만들었다”고 말했다.

▲방어전을 치르기 위해서는 약 2억원의 대전료가 필요하지만, 스폰서를 구하는 일은 하늘의 별따기다. 사진=오상민 기자

복싱선수로서 그의 목표는 이제 하나밖에 남지 않았다. WBC 챔피언에 올라 그랜드슬램을 이루는 것이다. 은퇴 후에는 대학 강단에 서서 후배들을 지도하는 것이 목표다. 그는 현재 중부대학교에서 박사논문을 준비 중이다.

그는 오늘도 기적을 일으키고 있다. 인간으로서 소화해내기 힘든 강도 높은 훈련을 아무렇지도 않게 견뎌내며 또 다른 기적을 준비하고 있다. 누구도 그를 알아주지 않아도 역사는 기억한다. ‘고독한 여전사’ 김주희는 대한민국 스포츠의 영웅이었다고.

‘링의 여왕’ 김주희는…

◇생년월일 : 1986년 1월 13일

◇신장ㆍ체중 : 160㎝ 50㎏

◇복싱입문 : 2001년(한국인 첫 여성프로복서)

◇주요 전적 : 2003년 한국챔피언, 2004년 IFBA 주니어 플레이급 세계챔피언(한국인 첫 여자프로복싱 챔피언), 현재 8대 기구 세계챔피언, 통산 20전 18승 1무 1패 7KO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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