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력과 금융수장]외환위기 때 줄사표…호남 출신 이유로 역풍 맞기도

입력 2012-04-04 10:11 수정 2012-04-04 11: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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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J·盧·MB 정권 금융수장의 부침

외환위기의 그늘은 금융권을 비껴가지 않았다. 아니, 더욱 치명적이었다 해도 과언은 아니다. 구조조정 1년 만인 1999년까지 11개의 은행이 문을 닫았고 금융인 4만여명이 거리로 내몰렸다. 은행장들 역시 추풍낙엽이었다. 퇴출 대상 은행 수장이나 상대적으로 안전한 은행 수장이나 모두 안심할 수 없었다. 정부가 단행하는 구조조정이란 큰 그림에 은행장들 한 두 명쯤은 눈에 띄지도 않는 쪼박그림에 불과했다.

◇외환위기에 추풍낙엽된 은행장= 사실 1998년 이전에는 청와대가 시중은행장들의 인사권을 좌지우지했다. 심지어 은행장 내정자가 밤 사이에 바뀌는 경우도 있었다. 은행 간 경쟁보다는 누가 어느 은행장 자리를 꿰차느냐는 관료들 간의 경쟁이 더욱 심했다. 하준경 한양대 교수는 “금융산업은 전통적으로 정부의 강력한 규제에 놓였다”고 말했다.

김대중 정부의 출범과 함께 수많은 은행장들이 낙마했다. 물론 당시 부실은행 퇴출과 은행의 통폐합 등 정부의 커다란 칼 앞에서 은행들이 제 목소리를 낼 수 없었던 상황이기도 했다.

1998년 7월16일. 금융감독위원회(현 금융감독원)는 외환·조흥·상업·한일·평화·충북·강원 등 7개 은행에 경영진 교체를 위한 주주총회를 열도록 지시했다.

금감위의 경영진 교체 지시는 7월 말 경영정상화 이행계획서 제출을 앞두고 은행들의 자구노력이 보이지 않는다는 명분이었다. 그러나 실상은 달랐다.

신한은행장(1985년)과 외환은행장(1988년)을 거쳐 재무부 장관(1991~1993년)을 역임한 이용만(79)씨는 “정부가 그려놓은 은행 퇴출 및 합병안 시행에 앞서 제대로 따르라는 압박이었다”고 회고했다.

장철훈 조흥은행장, 이관우 한일은행장, 배찬병 상업은행장 등이 줄줄이 금감위에 사표를 내야 했다. 장 행장과 배 행장은 은행장을 단지 1년이 채 되지도 않았다.

더욱이 이들 중에는 호남출신이 없었다. 장 행장은 경북 안동 출신으로 굳이 외환위기가 아니었더라고 교체될 가능성이 높았다. 이 행장은 경기, 배 행장은 서울 출신이다. 정권에 연을 닿으려 해도 연고지가 없었다.

장 행장의 뒤를 이은 이는 위성복 조흥은행장이었다. 그는 전남 장흥 출신으로 정권 실세와의 교분이 두터웠다. 그러나 호남 출신이란 장점(?) 때문에 역풍을 맞기도 했다. 조흥은행과 충북·강원은행의 합병설이 돌자 지방은행 노조들은 “호남 출신 행장을 살리려고 다른 은행을 죽인다”고 강하게 반발했다.

이 때문에 금융당국은 1998년 11월27일 위 행장에 구조조정에 실패한 책임을 물어 사퇴시켰다. 취임 4개월 만이었다. 하지만 5개월 뒤인 1999년 4월 행장추천위원회를 통해 다시 조흥은행장에 복귀했다. 당시 조흥은행 관계자는 “위 행장은 호남 지역 의원에 끈이 있는 은행 내 실세였다”며 “행추위를 통한다면 위 행장 말고는 다른 인물이 없다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었다”고 말했다.

2002년에는 홍석주 조흥은행장이 위 행장의 뒤를 이었다. 당시 49세라는 젊은 나이에 은행장에 오른 그는 위 행장의 측근으로 꼽혔다. 정권에서 외자유치라는 임무를 맡겼다는 관측이 돌았으나 유치에 실패하면서 노무현 정권 집권과 함께 1년 만에 행장에서 물러났다.

1998~1999년 외환위기와 맞물린 은행장 인선에 대한 잡음은 끊이지 않았다. “위기를 기회로 보고, 한 자리 노리는 관료가 있다. 호남 출신으로 모두 물갈이 하려 한다” 등의 설화였다. 그러자 김대중 대통령은 “은행장 인선에 개입하지 말라”고 지시했다. 득을 본 거는 송달호 국민은행장(1998~1999년)이다. 이규증 전임 행장이 돌연 사퇴하자 국민은행 출신이자 당시 부행장을 맡고 있던 그가 유력 후보로 떠올랐고 행장까지 올랐다. 하지만 이마저도 길지 않았다. 송 행장은 만 2년을 채우지 못하고 물러났다. 은행 구조조정 당시 이헌재 금융감독원장과 손발을 맞춘 김상훈 금감원 부원장이 2000년 국민은행장에 내정됐기 때문이다.

당시 금융권에서는 “구조조정이 거의 마무리 된 단계에서 관치금융이 부활했다”란 비판이 제기됐다. 국민은행 노조 관계자는 “국민은행을 다른 은행과 합병시켜 은행 덩치를 키우기 위해 김상훈이 왔다란 말이 나돌았다”고 당시 상황을 설명했다.

노무현 정권 시절, 잠깐의 휴식기를 지낸 정권과 금융수장의 얽키고설킨 설화는 2008년 이명박 정부가 들어서면서 다시 소란스러워졌다.

박해춘 우리은행장, 박병원 우리금융 회장, 강정원 국민은행장, 황영기 KB금융회장 등이 MB정권 집권과 함께 자리에서 물러났다. 우리금융 회장에는 이팔성, KB금융 회장에는 어윤대가 각각 오르면서 대표적인 MB맨으로 꼽혔다.

◇변곡 적었던 하나·신한은행= 정권 부침에 따라 휘청이는 금융수장들과 달리 뚝심있는 금융기관들도 있다. 하나금융은 지난 2002년 서울은행과 합병 이후 행장은 네 명(김승유-김종열-김정태-김종준), 회장은 두 명(김승유-김정태)뿐이다. 이들 모두 은행 내부 출신이다.

신한은행은 2003년 조흥은행 출신인 최동수 행장을 시작해 신상훈, 이백순, 서진원이 바통을 이어받았다. 이들 역시 모두 은행 출신으로 정권 실세와는 거리가 있다.

신한과 하나가 다른 금융사가 정권에 일희일비 한 것과 달리 내부 경영을 지속할 수 있었던 것은 존재감 있는 CEO란 버팀목이 있었기 때문이란 것이 금융권의 대체적인 시각이다.

신한지주는 라응찬, 하나금융은 김승유라는 금융 1세대가 강고하게 버티고 있었다. 이들 덕에 정권의 입김에서 견뎌낼 수 있었다는 것이다. 금융권 관계자는 “이들이 없었다면 이들 은행 역시 정치 외풍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을 것”이라고 평가했다.

※참고자료: 외환위기 징비록(정덕구 저·삼성경제연구소), 외환위기는 끝났는가1~2(윤제철 저·비봉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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