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인·기업가·정치인…현대사와 함께 '鐵의 인생' 살다

입력 2011-12-14 1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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故박태준 명예회장의 불꽃같은 일생

▲군시절=고 박태준 포스코 명예회장이 군 시절 동료들과 사진 촬영을 하고 있다.(연합뉴스)
박태준 명예회장의 1927년 경남 동래군에서 6남매 가운데 맞이로 태어났다. 일제의 식민통치시절, 총명함이 남달랐던 소년 박태준은 17살 되던해 주위의 일본 육군사관하교 입교 권유를 물리치고 와세다대학 공대를 진학한다.

그 무렵 소결로 공장에서 봉사활동을 하던 공학도 박태준은 그의 일생에서 가장 큰 기둥으로 자리잡을 쇳물과 처음 맞대했다.

해방이되고 학업을 중단한 박태준은 1948년 육군사관학교 6기 생도로 선발돼 입교한다. 군인 박태준의 삶은 여기에서 시작됐다. 탄도학을 강의하던 박정희 대위와 처음 만났던 때이기도 했다.

1953년 26세의 나이에 육군 중령으로 진급한 그는 5사단 참모를 시작으로 수많은 무공훈장을 목에 건다. 한국전쟁이 막바지에 다다를 무렵 화천수력발전소 방어를 위한 중공군과의 교전 지휘한 공로도 크게 인정받았다.

전쟁이 끝난후 부인 장옥자와 결혼하고 가정도 꾸렸다. 순탄한 군인으로서의 삶이 시작됐으나 이 역시 오래 가지 못했다. 1961년 5·16 군사혁명으로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비서실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박정희 대통령과 함께=1970년 4월1일 고 박정희 대통령, 김학렬 부총리와 함께 포항 1기 설비 종합착공식 발파 세레모니를 하고 있다.(연합뉴스)
평소 뚜렷한 의지와 냉철한 판단력, 굳은 의지를 앞세웠던 그는 장교로서의 명예를 언제나 최우선으로 삼았다. 진급도 빨랐다. 서른 여섯되던 1963년 육군 소장에 올랐던 그는 박정희국가재건회의 의장의 권유로 정치에 입문하게된다.

이름 그대로 국가재건을 위한 그의 행보도 여기에서 시작했다. 이미 기반산업이 다져진 일본을 밑그림으로 대한민국의 산업 전반의 청사진도 그렸다. 이를 위해 무엇보다 중요한 제철소 건립이 시급하다는 사실도 이때 깨달았다. 그의 능력과 의지를 높이산 박정희 대통령은 그를 대한중석 사장으로 임명했고, 박태준 사장은 경영난에 빠진 대한중석을 1년만에 흑자로 돌려놓았다.

1967년 마침내 정부의 종합제철소 건설프로젝트가 출범했다. 이를 추진하기 위한 추진위원장에는 누가뭐라할 것도 없이 박태준이었다. 박 대통령의 ‘제철공장 완수’ 특명을 완벽하게 완성할 수 있는 사람도 박태준이 유일했다. 1968년 포항종합제철주식회사로 회사 이름을 결정하고 창립식을 치르면서 포항제철 초대 사장의 자리에 올랐다. 그의 나이 마흔하나였다.

부족했던 건설추진 재원은 ‘대일청구권 자금 잔여금’을 사용키로 했다. 선조의 피가 얽힌 자금으로 제철소를 짓는다는 목 메임도 서려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배경이 훗날 제철소 건설 성공을 이끌어내는 훌륭한 자양분이 되기도 했다.

▲고로에 불 넣으며=고 박태준 포스코 명예회장이 1973년 6월8일 1고로에 불을 넣고 있다.(연합뉴스)
그렇게 3년여의 공사 끝에 1972년 경북 포항 영일만 앞바다를 바라보는 포항제철 증후판공장에서 첫 제품이 출하됐다. 마침내 박태준의 손에서 대한민국 최초의 일관제철소가 쇳물을 쏟아내기 시작한 때이기도 했다.

경영일선에서 능력을 인정받은 그에게 언제나 정치권의 영입제의가 뒤따랐다. 마침내 포항제철이 안정적인 운영체제에 돌입하면서 그는 11대 국회의원(민주정의당)으로 정계에 발을 들여놓는다. 이후 1990년 민정당 대표를 비롯해 13~15대 국회의원을 역임했다.

국회의원 박태준은 마침내 국민의 정부시절이었던 2000년 국무총리에 취임한다. 그러나 부동산투자와 관련된 잡음이 이어지면서 4개월여만에 총리직에서 물러났다. 그의 건강도 이때부터 악화되기 시작했다.

총리직에서 물러난 이듬해인 2001년. 74세의 은퇴 정치인 박태준은 미국으로 건너가 폐질환 수술을 받았다. 건강이 악화돼갔지만 자신의 젊은과 땀이 서려진 포항제철의 명예회장으로 위촉되면서 그는 ‘철인’이라는 수식어를 안게 됐다.

이후 2005년 그의 호를 따서 만든‘포스코청암재단’을 확장하고 포항공대 설립에도 적극 나서는 등 후학양성에도 매진했지만 세월을 거스를 수는 없었다. 2011년 12월. 식민통치 시절을 겪었던 젊은 공학도는 전쟁포화 속의 육군 장교와 기업가, 그리고 정치인을 거치는 파란만장한 삶을 마무리하고 조용히 포항제철의 역사속에 잠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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