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금 한국 금융에 던져진 가장 시급한 과제는 자본의 물길을 바꾸는 일이다. 오랜 기간 시중 자금은 부동산과 담보 중심의 안전한 영역에 고여 있었다. 그 결과 금융회사의 건전성은 높아졌을지 몰라도, 혁신기업과 미래 산업으로 향해야 할 모험자본 공급은 극심한 가뭄을 겪었다.
이런 점에서 ‘생산적 금융’은 단순한 정책 구호가 아니다. 부동산 등 비생산적 자산에 쏠린 자금을 인공지능(AI)·반도체·바이오·미래 모빌리티 등 전환기 산업으로 돌려 실질적인 성장과 일자리를 만드는 동력이다. 담보가 부족하다는 이유만으로 유망 기업이 자금 문턱 앞에서 좌절하는 구조를 깨는 것, 이것이 생산적 금융의 출발점이다.
다만 생산적 금융은 “기업대출을 늘리라”는 관치성 주문만으로 완성되지 않는다. 기술력과 미래 가치를 꿰뚫어 보는 심사 역량, 산업별 리스크를 분산하는 포트폴리오 전략, 정책과 민간의 위험 분담 체계가 정교하게 맞물려야 한다. 금융회사가 감당할 수 없는 부실까지 떠안는 방식이라면 지속 가능할 수 없다.
생산적 금융이 산업과 기업에 활력을 불어넣는 금융이라면 ‘포용금융’은 사람에게 다시 일어설 기회를 주는 금융이다. 우리 사회는 저성장과 양극화, 저출생·고령화라는 복합 위기 앞에 서 있다. 청년은 높은 주거비와 취업난 속에서 출발선의 격차를 체감하고, 소상공인은 내수 부진과 비용 증가에 벼랑 끝으로 몰리고 있다. 중·저신용자들은 제도권 금융의 문턱을 넘지 못해 고금리 사채시장으로 밀려나는 게 현실이다.
포용금융은 이들에게 단순히 시혜성 자금을 쥐여주는 정책이 아니다. 청년에게는 미래를 준비할 시간을, 소상공인에게는 사업을 지속할 버팀목을, 중·저신용자에게는 신용 회복과 재도전의 사다리를 제공하는 일종의 ‘사회적 투자’다. 한 사람의 재기와 한 소상공인의 회복은 결국 전방위적인 경제 활력으로 이어진다.
최근 금융당국이 포용금융 추진 체계를 강화하는 것도 이 같은 문제의식에서 비롯됐다. 은행들이 가장 안전한 고객과 담보만을 쫓는다면 금융의 영토는 좁아질 수밖에 없다. 금융 소외를 줄이고 중금리 시장의 단층을 완화하는 것은 금융산업이 외면할 수 없는 공적 책무다.
그러나 포용금융 역시 ‘실적 채우기’식 숫자에 매몰돼선 곤란하다. 공급 규모만 앞세우다간 상환 능력 평가가 부실해져 연체율 상승과 금융권 건전성 악화라는 부메랑으로 돌아올 수 있다. 이미 금융권은 자영업자 다중채무 증가와 경기 둔화에 따른 신용위험 확대라는 부담을 떠안고 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선 통신비 납부 이력, 플랫폼 매출, 현금흐름, 소비 패턴 등 비금융 데이터를 활용한 대안신용평가(CSS)를 고도화해야 한다. 전통적 금융 이력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배제됐던 차주들을 AI와 고도화된 데이터 분석을 통해 입체적으로 평가하고, 상환 가능성이 있는 이들에게 적정한 금리와 한도를 열어주는 데이터 기반의 혁신이 필요하다.
금융이 제공하는 가장 위대한 가치는 자금 그 자체가 아니라, 더 나은 미래에 도전할 수 있다는 ‘희망’이다. 기업에는 성장의 발판을, 산업에는 미래 경쟁력을, 사람에게는 다시 일어설 기회를 주는 것. 그것이 오늘날 금융의 진짜 역할이다. 생산적 금융과 포용금융이 말 잔치로 끝나지 않으려면, 이제 필요한 것은 차가운 머리로 실행하는 지속 가능한 설계도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