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경제의 아킬레스건인 내수 침체가 기대수명 증가, 고령화 등 인구문제와 직결돼 있다는 연구 결과가 나왔다. 한국개발연구원(KDI)은 23일 ‘인구 요인이 소비성향에 미치는 영향과 시사점’ 보고서에서 인구 문제가 민간 소비 위축을 부르고 이것이 내수 침체를 낳는다고 분석했다. 지난 20년간 연평균 민간소비 증가율(3.0%)이 국내총생산(GDP) 증가율(4.1%)을 밑돈 것도 무관치 않다. 은퇴 고령층이 긴 여생에 대비해 소비 대신 저축을 택하면서 소비성향이 하락하는 결과가 초래됐다는 것이다. 개인의 합리적 선택이 국가 차원에선 불합리한 결과를 빚는 전형적 모델이라고 할 수 있다.
KDI 보고서는 기력을 잃은 국가 경제를 되살리려면 어떤 고민을 해야 하는지에 대한 통찰을 준다. KDI의 김미루 연구위원은 “기대수명 증가에 대응해 은퇴 시점이 적절히 조정될 수 있도록 고령층의 노동시장 참여를 제약하는 구조적 요인들을 해소할 필요가 있다”고 했다. 우리 사회의 ‘뜨거운 감자’인 정년연장 문제를 소환한 제언이다.
정년연장은 이미 발등의 불이다. 6월 조기 대선 시즌을 맞은 정치권부터 선불 맞은 멧돼지처럼 돌진하고 있다. 원내 1당인 더불어민주당도, 2당인 국민의힘도 정년연장의 문을 활짝 열고 논의의 폭을 넓히고 있다.
국민의힘은 최근 직무성과급 중심으로 임금체계를 개편하겠다고 했다. 정년 유연화·계속 고용제 추진 방침도 시사했다. 민주당은 노동계가 원하는 법정 정년연장에 방점을 찍고 있다. 임금체계를 바꾼 후 정년연장을 법제화한다는 것이다. 법정 정년을 65세로 연장하는 법률 개정안 9건이 국회에 계류 중이다. 좌우를 막론하고 대선 일정이 다가올수록 목청을 높이게 마련이다.
하지만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 정년연장은 특정 법적 연령까지 일을 하는 문제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다. 연금개혁·복지 체제 등 수많은 국책 과제와 맞물리는 사안이다. 기업·시장의 자유와도 맞물린다. 인구학적 충격으로 미루어 비상구를 찾는 일을 더 미룰 수는 없다. 하지만 사회적 중지를 모아 현답을 찾는 대신 정치적 포퓰리즘으로 섣불리 접근하면 큰 탈이 난다. 적어도 싸구려 매표 수단으로 소비돼선 안 된다.
전문가들이 가리키는 방향은 대체로 일치한다. KDI 김 연구위원은 “정년퇴직 후 재고용 제도를 활성화하는 등 노동시장의 마찰적 요인을 해소해 고령층 노동 수요를 확대할 필요가 있다”고 했다. 한국은행도 앞서 ‘초고령사회와 고령층 계속근로 방안’ 보고서를 통해 법정 정년연장이 아니라 ‘퇴직 후 재고용’이 올바른 방향이라고 했다.
맨 먼저 초고령사회로 달려가는 일본의 선택도 참고할 필요가 있다. 정년 폐지, 퇴직 후 재고용, 65세 정년 연장 등 세 가지 방안 중 하나를 기업이 자율적으로 선택하도록 하고 있다. 2022년 기준으로 계속 고용 비율은 70.6%에 달했고 정년 연장과 정년 폐지는 각각 25.5%, 3.9%였다.
기업·시장과 미래세대 동의를 얻지 못하는 정년연장 논의는 갈등과 분열을 키울 뿐 실익이 없다. 이 점만 명심해도 헛된 논의는 피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