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주의 키워드] 미들클래스 오블리주 (Middle-class Oblige) - 왜 중산층만 살신성인· 자기희생인가

입력 2016-10-27 10: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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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코스카저널 주간

‘노블리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가 다시 회자되네요. ‘상류층의 책임의식. 상류층의 자기희생’이 어느 때보다 필요하다는 말과 함께 등장하지요. ‘나라가 위기’라는 말과 함께 말입니다. 틀린 건 아니지요. 상류층이 상류층이 된 건 자신들의 노력 덕분만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머리 좋고 노력 많이 했다 한들 주변 도움이 없었다면 상류층이 될 수 없었을 겁니다. 노블리스 오블리주는 그런 도움에 보답하는 것이겠지요.

그러나 우리나라는 노블리스 오블리주를 보기 어려운 곳이지요. 앞으로도 그럴 것 같고요. 오히려 중산층 이하의 자기희생이 많지요. 어디 한번 보시겠어요?

9월 9일 서울 서교동 원룸 건물에서 불이 났지요. 안치범이라는 스물아홉 살 청년이 5층 건물을 오르내리며 21개 방문의 초인종을 일일이 눌러 입주자들을 대피시켰습니다. 정작 자신은 불을 피하지 못해 연기에 질식한 채 5층 계단에서 쓰러져 끝내는 목숨을 잃었답니다. 안 씨는 성우가 되기를 꿈꾸던 ‘평범한’ 청년이었습니다.

10월 13일 밤, 열 명이 숨진 울산 관광버스 화재사고 현장에서 부상자들을 불타는 버스에서 구출해 병원으로 옮겼던 서른 살 소현섭 씨. 연료탱크 폭발과 같은 2차 사고가 일어날 뻔한 매우 위험한 상황이었는데도 현장에 뛰어들어 네 명의 목숨을 구해냈지요. 강원 묵호고 윤리교사인 소 씨는 “그런 사고 현장에서는 누구나 그렇게 했을 것”이라고 말했을 뿐 자기 목숨은 전혀 괘념치 않았어요.

십 수년 전 일본 도쿄 지하철역에서 선로에 떨어진 술 취한 사람을 구출하고 자신은 전동차에 치여 숨진 유학생 이수현 씨도 평범한 집안 출신이었습니다.

우리나라 중산층은 이렇게 국내외에서 살신성인, 자기희생의 모범을 보이는데 상류층 인사들의 오블리주는 들어본 적이 없네요. 하긴 그럴 수밖에 없을 겁니다. 원룸 살거나 지하철 타는 상류층이 어디 있겠어요? 고속도로에서 불타는 버스를 보고 뛰어내리려면 비서나 운전기사가 말리지 않겠어요? “지금 여기서 이러시면 안 됩니다”라고 말입니다.

그래서 저는 우리나라에서는 노블리스 오블리주 대신 ‘미들클래스 오블리주’라는 숙어를 제안합니다. 중산층의 자기희생이라는 뜻으로 말입니다. 구한말과 일제강점기가 우리나라에서 노블리스 오블리주가 실천됐던 마지막 시기였다는 관점도 있으니 제 말이 크게 틀리지는 않을 것 같아요. 집과 논밭을 팔아 가솔들을 이끌고 망명, 풍찬노숙하며 만주벌판에서 독립운동을 하다 세상을 떠난 몇몇 선비들을 마지막으로 한국의 노블리스 오블리주는 사라졌다는 게 이 관점의 요지입니다. (친일파 후손이 어쩌니, 부정부패 기득권 계층이 어쩌니 하는 건 이 자리에서 피하겠어요. 저보다 훨씬 잘 알고 이에 분노하고 있는 분들이 많을 테니까요.)

그런데 미들클래스 오블리주는 저 혼자만의 생각이 아니더군요. 노블리스 오블리주의 본보기로 회자되는 타이타닉호 침몰 사고에서 성인 남자 승객의 생존율이 가장 높았던 계층은 상류층인 일등실 승객(33%)이었어요. 다음은 하류층인 삼등실 성인 남자(16%)였으며, 중류층인 이등실에 탑승한 성인 남자의 생존율(8%)이 가장 낮았다고 합니다. 비율로 따지면 중류층이 하류층의 두 배, 상류층의 네 배 이상 더 죽은 겁니다.

제임스 분과 카렌 케슬러 두 학자가 1999년 ‘타이타닉 생존자 신분 조사’에서 밝힌 이 통계는 타이타닉호의 오블리주는 상류층의 것이 아니라 이등실의 중류층-미들클래스의 오블리주였음을 증명합니다.

그런데 왜 중류층이었을까요? 왜 미들클래스 오블리주였을까요? 분과 케슬러 두 학자는 일등실 승객의 생존율이 높은 것에 대해 “부자들은 숨을 수 있는 피난처가 있기 때문에 불명예를 선택했다. 구차하게 목숨을 건졌다는 비난 따위는 성채 같은 저택에 들어가 있으면 들리지도 보이지도 않는다는 생각이 부자 남성들을 허겁지겁 구명보트에 뛰어들게 했다”고 설명합니다.

우리나라 상류층에게도 이런 분석이 가능하지 싶습니다. 성채 같은 저택은 당연하고, 제주도 빌라촌, 한강변 별장지대도 숨어 지내기 좋고, 여차하면 미국이나 일본, 유럽으로 튀면 될걸요. 이미 그런 사례도 많았잖아요. 노블리스 오블리주 따위는 신경 쓰지도 않을 겁니다. 애초에 귀족-노블리스가 아닌 사람들에게 오블리주를 요구한 것이 잘못이지요.

한편 삼등실 승객들의 생존율이 높았던 것은 ‘가난해서 명예 따위를 위하여 목숨을 버릴 마음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분석됐습니다. 구명보트와 멀리 떨어져 있었지만 혼자라도 살아남는 것이 살 길이라는 생존 본능이 아등바등 갑판 위로 밀어내고, 올려붙여 살아남게 했다는 것이지요. 없는 사람들 삶의 처절함을 반영한 이 논리는 바로 그런 이유로 찜찜하긴 한데 틀리지는 않다는 생각입니다. 그래봤자 일등실보다 두 배나 더 죽었지만요.

그렇다면 이등실 남성 승객의 사망률이 가장 높은 이유는? “중산층 남성들은 보다 높은 사회계층을 지향해왔고 자신들보다 잘사는 사람들에 대해 존경을 표하는 기술을 연습해왔기 때문”이라는 게 두 사람의 결론입니다. 알쏭달쏭하지만 ‘중산층은 그렇게 교육되었다’는 뜻인 것 같기도 합니다.

어제오늘 나라의 위기가 진짜임이 드러났습니다. 이론대로라면 중산층의 희생이 늘어나게 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이를 어쩌나! 중산층은 이미 붕괴됐는데! 희생을 감수할 중산층이 과연 있기나 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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