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망 2016] 삶의 질서 망실한 사회, ‘자연스러운 경건’ 되살려야

입력 2016-01-07 1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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⑤문화: 김우창 고려대 명예교수·문학평론가 (끝)

윌리엄 워즈워스는 일생 자연을 노래하고 또 자연 가까이서 살았다. 그러나 그의 시대는 혁명의 시대였고 산업화가 급속하게 진행되고 있는 시대였다. 그러니 만큼 더욱 그는 사람의 삶이 자연으로부터 멀어지는 것을 개탄하고 자연 가까이 사는 것을 귀중하게 생각했다. 그는 한 소네트에서 그의 시대를 다음과 같이 요약하였다.

아침으로 저녁으로 세상은 너무 우리와 함께 있느니,

우리는 벌고 쓰는 일에 모든 힘을 탕진하고,

자연 속에 있는 우리의 것을 모두 놓쳐버리고,

줄 만한 것이 아닌 데에, 마음을 주어버리니.

달빛을 향하여 가슴을 펼치는 바다,

시간을 가리지 않고 불어 외치다,

잠들어 버린 꽃잎처럼 접힌 바람,

이 자연의 율조에 빗나가서…(하략)

그러나 워즈워스는 어떤 때는 자연이 아니라 너무 많이 끼어드는 세상을 대표하는 런던과 같은 도시의 아름다움에 감격하기도 하였다. 1802년 웨스트민스터 교(橋) 위에서 착상한 런던에 관한 시가 이 감격을 기록하고 있다.

지구는 이보다 아름다운 것을 보일 수 없다.

그와 같은 숭엄한 풍경을 보고 감격 없이

지나치는 사람의 영혼은 참으로 막혀 있으리.

도시는, 지금 도포를 걸쳐 입은 듯, 아침의

호젓하고 조촐한 아름다움의 옷을 입었다.

선박이며, 탑이며, 사원이며, 극장이며. 교회며,

들녘과 하늘을 향하여 열려 있느니,

모두가 연기 하나 없는 대기 속에 빛나며.

태양도 골짜기와, 바위 그리고 언덕을 아침의 찬란함으로

이보다 더 아름답게 비춘 일은 없느니. 일찍이

나 또한 그처럼 깊은 고요함을 본 일이 없느니.

강물은 스스로의 고운 뜻에 맞추어 흐르고,

오, 신이여, 집들까지도 잠들어 있는 듯,

그 거대한 심장이 고요히 쉬고 있는 듯.

앞의 소네트는 돈 벌고 쓰는 세상일에 정신을 빼앗긴 사람들의 삶을 이야기한 것이다. 사람들은 그러한 세상의 너머에 자연이 존재한다는 것을 완전히 잊어버린다. 그리고 자신들의 진정한 모습이 자연 속에 있다는 것도 잊어버린다. 그러나 두 번째의 시는, 이러한 삶을 조장하는 도시도 때로는 하나의 조화된 풍경으로 보이고 또 느껴질 때가 있다는 것을 말한다.

앞에서는 근대 문명의 문제점이 자연의 질서를 잊어버린 데 있다고 했는데, 여기에서는, 바로 그러한 자연 망각의 근대를 대표하는 대도시를 아름다운 풍경으로 말한다. 이 긍정은 어디에서 오는가? 하나의 이유는 시인이 도시를 자연의 일부로 확인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에게 도시도 들녘과 하늘과 골짜기와 바위와 언덕에 이어져 있는 것이 보인 것이다.

주의할 것은 도시의 여러 건축물과 자연을 하나로 보는 것이 그의 시각이라는 점이다. 도시가 좋게 보인 것은 시인이 도시 전체를 하나로 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여 세상사를 멀리서 바라보는 시인의 눈길, 그 관조적(觀照的) 태도가 풍경의 전체적 조화를 볼 수 있게 한 것이다. 물론 그러한 관조가 가능한 것은 이른 아침이 되어서 도시가 고요하게 잠들어 있는 상태였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전체의 조화를 보는 시인의 눈, 시인의 마음이 있었기에, 고요함이 그 마음을 깨어나게 하고. 그 깨어남이 도시 전체를 하나로 볼 수 있게 한 것이다.

여기의 시인의 마음이란 자연 질서의 전체를 존중하는 마음이다. 그것은 삶의 전체 질서로서의 자연을 경건하게 대한다.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져 있는 워즈워스의 시 하나는 ‘무지개’이다. 그 시는 “무지개를 볼 때면, 가슴이 뛴다”는 것으로 시작하여, 무지개를 볼 때의 감흥은 어릴 때나 어른이 되어서나 마찬가지인데, 그러한 감격이 오래 계속되기를 바란다고 한다.

‘나의 삶의 나날이 자연스러운 경건함’으로 하여 하나로 묶여 있기를 그는 원한다. ‘자연스러운 경건함, natural piety’란 사람의 마음속에 자연스럽게 존재하는 경건함일 수도 있고 자연이 사람의 마음에 불러일으키는 경건함일 수도 있다.

하여튼 이 말은 두 가지 요소를 가지고 있다. 하나는 자연이라는 객관적 사실, 즉 전체로서의 환경적 상황을 말하고, 다른 하나는 경건함이라는 마음의 상태를 가리킨다(라틴어의 pietas를 번역한 것이 경건[敬虔]이라는 말일 터인데, 이 두 말은 함축된 의미로 보아 서로 잘 맞아들어 가는 것으로 보인다. 주자학[朱子學]에서 핵심적인 윤리적 태도를 의미하는 ‘경(敬)’은 현대어로 옮겨 ‘주의’라고 설명하는 경우가 있는데, 조금 더 정확히는 ‘외포감을 동반한 주의’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워즈워스에게 삶의 큰 질서를 나타내는 자연은 저절로 삶에 아름다움과 평화와 고요함을 주는 것으로 생각되었다. 자연이 실제 사람의 삶에서 그러한 역할을 할 수 있는지 어쩐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원만한 삶을 사는 데에, 자연이 대표하는 바와 같은, 삶의 전체적인 질서가 필요하고 그 질서가 아름다움과 평화의 질서라야 한다는 것은 사실일 것이다. 이 평화의 질서를 시각과 감각으로, 그리고 그것을 전체로서 느낄 수 있게 하는 것이 자연이었다.

그런데 이 자연의 질서를 끊임없이 바꾸어 놓는 것이 문화다. 그러나 그것은 삶의 질서 전체를 보다 조화로운 것이 되게 하려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니까 자연을 바꾸어 놓는 변화들도 전체적인 질서, 즉 삶의 근원적 요구에 맞는 전체 속에 통합될 수 있는 것이라야 한다. 그리고 궁극적으로 그것은 자연의 질서 속에 큰 갈등 없이 존재할 수 있어야 한다. 문화를 생각한다는 것은 이 전체적인 질서를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삶의 조화된 질서, 즉 자연을 변형하면서도 조화된 전체로 남아 있어야 하는 삶의 질서를 잃어버린 것이 오늘의 사회다. 문화도 그 본래적 기능을 상실한 것으로 보인다. 삶에 대한 경건한 마음, 거경궁리(居敬窮理)하는 마음이 상실된 것이 오늘의 세계, 특히 한국의 사회다.

문화와 관련하여 창의 또는 창조가 이야기될 때, 그것은 세상의 벌고 쓰는 일에 문화가 힘이 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문화콘텐츠’라는 말이 이렇게 이해되는 문화의 기능을 압축하여 표현한다. 벌고 쓰는 일이 없어도 삶은 살 수 없겠지만, 삶의 의미를 전체적으로 평가하고 조정하는 일을 포기한 삶이 좋은 삶일 수는 없다. 그러한 삶은 진정한 의미의 문화가 존재하지 않는 삶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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