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경아의 라온 우리말터]눈 이야기

입력 2014-12-12 15: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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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부 교열기자

설국(雪國)이 시작됐다. 오홋! 눈꽃이 펄펄 날린다. 이른 아침 햇살 아래 빛나는 눈 덮인 산은 낭만적이다. 눈이 내리면 ‘국경의 긴 터널을 빠져나오자, 눈의 나라였다. 밤의 밑바닥이 하얘졌다’로 시작하는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설국’이 떠오른다. 새하얀 겨울의 들판에 펼쳐진 사랑담이 애상적 분위기를 자아내 소름이 돋을 정도다. 보리스 파스테르나크의 거대한 설원 속 운명적·서사적 눈 이야기 ‘닥터 지바고’와는 또 다른 감동을 전한다. 눈 내리는 밤을 ‘머언 곳에 여인의 옷 벗는 소리’(설야)로 표현한 김광균은 앞서간 모더니스트가 분명하다.

눈이 빚어내는 환상적 분위기만큼이나 눈의 종류도 다양하다. 표준국어대사전에서 ‘눈’ 관련 표준어만 추려도 30개가량 된다. 연말연시 포근한 느낌이 나게 내리는 눈은 ‘서설(瑞雪)’이다. 서설은 말 그대로 상서로운 눈이다. ‘눈 온 뒷날은 거지가 빨래한다’는 속담이 생겨날 정도로 서설이 내린 날엔 날씨 또한 포근하다. 함박눈의 한박은 ‘큰 박’이라는 뜻으로 함박눈이란 큰 박꽃같이 하얀 눈을 이른다. 기온이 낮을 때 내리는 쌀알 같은 눈은 ‘싸라기눈(싸락눈)’이라고 하는데 비가 오다 찬바람을 만나 얼어서 떨어지는 것이다. 가는 비를 가랑비라 하듯 잘게 내리는 눈은 ‘가랑눈’이다. 포슬눈, 자국눈 역시 발자국이 겨우 날 만큼 적게 내린 눈을 일컫는다. 비와 섞여 내리는 눈은 진눈깨비로, 진눈깨비의 진은 ‘질다’는 의미다.

밤 사이 사람들 모르게 내려 아이들에게 즐거움을 선사하는 눈은 ‘도둑눈(도적눈)’으로, 들판에 한 길이나 되게 많이 오면 ‘길눈(잣눈)’이라 한다. 발등까지 빠지게 내리는 눈은 ‘발등눈’, 눈이 많이 쌓인 가운데 길은 ‘눈구멍길’이라고 한다. 눈이 와서 쌓인 상태 그대로의 깨끗한 눈은 ‘숫눈’이며, 온 세상을 하얗게 뒤덮은 눈 위를 아무도 지나가지 않은 길은 ‘숫눈길’이라고 일컫는다. 장독대의 소담하고 탐스러운 ‘복(福)눈’은 풍요로움을 선사하고, 봄날 벚꽃 흩날리듯 내리는 ‘갈기눈’은 새 계절에 대한 시샘이다. 추운 지역이나 높은 산에 늘 녹지 않고 쌓여 있는 만년설은 대자연 앞에 선 인간에게 경이로움을 안긴다.

상고대는 순수한 우리말로 나무서리, 얼음꽃으로도 불린다. 밤새 내린 서리가 나뭇가지에 매달려 얼어붙은 것으로 겨울 나무의 눈물꽃, 은구슬꽃이다. 상고대는 동틀 때 가장 아름답다. 붉게 떠오른 햇살을 받아 반짝이던 은구슬꽃은 바람이 불면 무지갯빛을 뿜어내 황홀경에 빠뜨린다. 눈 쌓인 산을 이른 새벽에 오르는 이유다.

눈과 관련해 많은 사람들이 헷갈려 하는 말로 ‘뒤덮다’가 있다. ‘복눈이 내려 온 세상이 하얗게 뒤덮였다’로 써야 할 것을 ‘뒤덮혔다’로 잘못 쓰는 이가 많다. 빈 데가 없이 온통 덮다, 꽉 들어차게 하다는 뜻의 ‘뒤덮다’의 피동사는 ‘뒤덮이다’이다. 뒤덮여, 뒤덮인, 뒤덮이니 등으로 활용된다. ‘뒤덮히다’란 말은 존재하지 않으므로 뒤덮혀, 뒤덮힌, 뒤덮히니는 틀린 말이다.

첫눈은 기다림과 약속의 밀어(密語)인 양 설레게 한다. 첫눈 내리는 날 만나자는 낭만적 약속을 안 해 본 사람이 있을까. 그러고 보면 첫눈엔 사랑과 그리움이 스며 있다. 수필가 피천득 선생이 생전 김재순 전 국회의장과 첫눈이 내릴 때마다 통화를 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40년 넘게 이어졌다니 부러울 따름이다. 젊은이든 중년이든 첫눈에 대한 낭만과 추억은 영원할 것이다. 내년 봄엔 손톱에 봉숭아물을 들이고 첫눈 내리는 날을 기다려야겠다. 상상만으로도 삭막해진 마음에 온기가 도는 듯해 입가에 미소가 머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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