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순왕후의 수렴청정은 여성의 정치 참여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으로 인해 짧은 기간에 마무리될 수밖에 없었다. 1575년(선조 8) 1월 44세의 나이로 창경궁에서 승하했다.
시호는 선열의성인순(宣烈懿聖仁順)이다. 능호는 강릉(康陵)으로 서울 노원구 공릉동에 있다.
공동기획: 이투데이, (사)역사 여성 미래, 여성사박물관건립추진협의회
이후 3년 뒤 의종은 시해되었는데, 무비가 어떻게 되었는지는 기록에 없다.
무비는 천인 출신으로 후궁이 되어 총애를 받았으나 그 자신 내명부에 임명되지도 못했고 자식들도 왕자와 왕녀로 대우받지 못하였다. 그녀는 고려시대 천인 출신 후궁의 위상과 특징을 잘 보여주는 존재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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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남4녀의 자식을 낳았으며, 이 중 세 명이 왕이 되었고, 그녀는 태후가 되었다. 왕비 책봉문에 의하면 그녀는 ‘덕망 높은 가문에서 출생하여 모든 행동에 반드시 예절을 지켰다’고 되어 있다. 그녀 역시 당시대가 요구하던 도덕에 충실했던 여성이었다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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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비 자매는 정치적 이유로 조카와 혼인해야 했고, 또 아비가 남편을 죽이려는 모의에도 가담해야 했다. 이후에는 조정 신하들에 의해 강제로 이혼당하기도 하였다. 여성으로서의 인생은 불행했다 하겠지만, 자신의 의지로 ‘의리’를 선택하며 살았다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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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경태후는 최고 귀족가문의 딸로서 왕비가 되어 원자를 낳고 남편의 극진한 사랑을 받았다. 그녀에 대한 왕의 총애는 이후 이자겸 세도의 근원이 되었다. 여성으로서 그녀는 당시대가 요구하던 부덕에 충실한 삶을 살았다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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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 파평 윤씨와 정주 유씨 간에는 몇 겹으로 중첩되는 혼사가 이루어졌던 것이다.
유씨부인은 고려 전기 최고 귀족가문의 여성이었다. 그녀의 묘지명은 당대 여성의 삶과 부덕뿐 아니라 귀족들의 혼인 행태에 대해서도 많은 것을 시사해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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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를 통해 부모에 대한 효를 우선시하는 신라인의 사고를 엿볼 수 있다. 또한 지극한 효(孝)는 현세에서는 구체적으로 왕의 포상, 내세에서는 최종적으로 불교로 귀의라는 선(善)에 도달한다는 관념도 가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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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미모가 뛰어난 일반여성이라기보다는 샤먼으로, 신물에 잡혀가는 것은 강신(降神) 현상을 말하는 것이라고 보았다. 향가에서의 수로부인은 누군가의 아내와 어머니가 아니라 그 존재 자체로 칭송받고 있다. 수로부인의 아름다움과 신이함이 당대인들에게 선망의 대상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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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혜명왕후와 그의 일족들에게 위기감을 주었던 것이다.
효성왕은 후사가 없이 죽었다. 효성왕의 동생인 경덕왕이 즉위하였고, 혜명왕후는 태후가 되었다. 혜명왕후는 신라 왕실에서 ‘왕후’의 지위를 적극적으로 쟁취하고, 지켜내는 모습을 생생하게 보여주는 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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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흥왕비는 자신이 출가하여 영흥사에 머물렀던 이유에 대해 법흥왕의 뜻이 아닌 신라 최초의 비구니인 사씨의 행적을 따른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 보도부인은 신라 초전(初傳) 불교의 또 다른 주역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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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재 김규식) 창립위원과 집행위원, 민족자주연맹(주석 김규식)의 부녀국장으로 활동했다. 대한민국 정부수립 후에는 피어선성경학교, 정신여자중고등학교, 서울여자대학에서 교육 활동과 이사 활동, 그리고 여전도회 활동에 주력했다. 1990년, 정부는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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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의 거대한 전국적 여성조직이 탄생하였던 것이다. 사업으로 의식주 생활개선 사업, 문맹 퇴치, 사상 및 예의범절교육을 실시했다.
1949년 11월 창덕여중·고 교장으로 발령 받아 부녀국장에서 퇴임하였고, 교장 재임 중 6·25전쟁이 발발하여 납북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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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단체 활동으로는 1953년 MRA(도덕재무장운동)대회 한국대표, 1953년 대한부인회 최고위원, 3·1여성동지회 회장을 맡기도 했다. 서울에 숭의여자중고등학교를 설립하여 이사장으로서 교육사업에도 종사하였다. 1963년 대통령표창, 1980년 건국포장, 1990년 애국장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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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회의원 활동 중 내내 여권 신장과 민권 수호에 앞장섰다.
정계 은퇴 후에는 1972년 경기도 안양 근명여자상업학교의 이사장으로 여성교육에 여생을 바치면서, 국토통일원 고문, 육영수여사추모기념사업회 이사장, 국정자문위원 등을 역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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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부터 1961년까지 중앙여중·고교 교장으로 재임하며 여성 교육에 앞장섰다. 1961년 추계학원의 이사장이 되어 추계유치원에서 추계예술대학교에 이르는 종합학교 법인으로 성장시켰다. 1980년 12월 이사장직을 사퇴하였다. 1962년 8월 문화훈장 대통령장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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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탉’을 강조한 인선왕후의 캐릭터는 이렇게 형성된 것이 아닐까 한다.
‘암탉 운운’은 요즘 여성들에게는 그다지 듣기 좋은 말이 아니다. 그러나 인순왕후의 ‘암탉론’은 당시의 정치적인 역학관계 속에서 그녀가 택할 수 있는 최선의 전략이었는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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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조에게 강빈은 정적일 수 있었다.
강빈은 다소곳하기보다는 적극적인 세자빈이었다. 다음 세대의 권력자인 세자와 세자빈은 현 왕에게 가장 중요하면서도 경계의 대상이 된다. 적극적이고 능력 있는 강빈은 시아버지 인조에게 매우 위협적인 존재였던 것이다. 강빈은 숙종 때에 복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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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으로 긴 실랑이 끝에 겨우 어보가 인조의 손으로 넘어간 것이다.
흔히 인목대비를 광해군의 불쌍한 폐모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실상 들어가 보면 그녀는 광해군의 실질적 정적이었으며, 또 인조반정에도 상당한 정치력을 발휘한 왕실의 만만치 않은 대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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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혜왕후의 존재감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이후 안순왕후는 소혜왕후와 사이좋게 대비 노릇을 했다. 여기서 ‘사이좋게’가 중요한 반전이다. 그것은 제안대군을 지켜내는 방법이었다. 왕위 계승에서 밀린 ‘대군’은 언제나 경계의 대상인데, 그 위험으로부터 아들을 지켜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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