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삼 정부 시절 권영해 전 국가안전기획부(국정원 전신) 부장을 비롯해 김대중ㆍ노무현 정부 때 각각 임명된 이종찬ㆍ김승규 전 원장, 이명박 정부 시절 국정원 1차장을 지낸 남주홍 등 전직 국정원 간부들이 선언에 참여한다.
이들은 선언문에서 “문재인 정권이 적폐 청산의 구실 아래 국가정보기관을 형해화시키는 데 앞장섰다”면서 “국가안보 위기를 극복하고...
전날 문 대통령이 3·1절 기념사에서 "첫 민주 정부는 김대중 정부"라고 언급한 것을 두고 국민의힘이 '김영삼 정부(문민정부)를 패싱했다'고 비판한 것에 대해선 "당연히 1987년 이후 정부가 민주정부"라면서도 "그러나 김대중 정부는 위대한 국민의 힘으로 처음으로 평화적인 정권 교체를 이뤘고 국제사회에서 자신 있게 민주주의 국가라고...
김영삼 정부에서 현실을 무시한 개혁을 밀어붙이다가 이른바 ‘농안법( 농산물 유통 및 가격안정에 관한 법률) 파동’을 야기했다. 이명박 정부에서 한미 간 관계 정상화에 초점을 두다가 졸속협상으로 ‘광우병 쇠고기 파동’을 야기했다. 박근혜 정부에서 미래창조과학부 등 정부 기능 개편에 역점을 두다가 주요 국정 개혁 시기를 놓쳤다. 문재인 정부에서 남북관계에...
고(故) 김영삼 전 대통령의 업적을 기리고 정치적 뜻을 이어가기 위한 '지금 다시 김영삼' 행사를 위해서다.
22일 고 김 전 대통령의 손자이자 윤석열 국민의힘 대선 후보의 청년 보좌역을 맡은 김인규 통합과 화합 포럼 대표는 사단법인 김영삼민주센터와 함께 부산 벡스코 제2전시장 A홀에서 '지금 다시 김영삼, 통합과 화합의 정신으로'라는 이름의 행사를 오는 25일...
1987년 대선 때 김영삼·김대중 후보는 단일화 실패로 노태우 후보에게 어부지리를 안겼다. 1997년 대선과 2017년 대선은 후보가 분열한 진영이 패했다.
단일화에 성공한 사례는 세 차례 있다. 1997년 대선 때 DJ는 DJP연대로 39만 표 차의 신승을 거뒀다. 2002년 대선 때 노무현-정몽준 단일화도 절반은 성공한 사례다. 선거 전날 정 후보가 지지를 철회, 단일화가 깨졌지만...
이 전 대표는 “경제 성장도 복지도 민주당 정부가 더 잘했고 남북정상회담은 민주당 정부에서만 열렸다”며 “김영삼 정부의 개혁과 노태우 정부의 북방정책은 평가하나 IMF(국제통화기금) 외환위기, (박근혜) 대통령 범죄와 탄핵도 국민의힘 정부에서 생겼다”고 비교하기도 했다.
문 대통령 사과 요구에 “왜 ‘사과해줘’라고 매달리나”라고 비꼰 이준석 국민의힘...
1995년 김영삼 정부 당시 준칙주의로 대학 설립이 자유로워짐에 따라 전문대와 4년제 대학 수가 급증하였다. 4년제 대학 입학자 수는 1995년 28만3000명에서 2010년 38만1000명까지 지속해서 늘어나지만, 전문대는 1995년 22만3000명에서 2001년 32만2000명 정점을 기록한 이후 지속적인 하향세를 이어 왔다. 2000년 초반 이후 전문대 입학자원 감소는 2002년부터 학령인구 감소로 인해...
1987년 대선에서 김영삼(YS)·김대중(DJ) 두 후보가 단일화에 실패해 모두 출마하면서 표가 갈려 승리한 결과였다. 제15대의 김대중 새정치국민회의 후보는 40.27%로 당선됐다. 1990년대 최저 득표율이다. 2위인 이회창 전 총리가 38.74%로 대선 사상 최소 표차로 석패했다.
대통령 5년 단임제 이후 최고 득표율은 제18대의 박근혜 후보가 기록한 51.5%다. 유일한 과반...
고 김영삼 전 대통령의 배우자 손명순 여사는 변함없는 내조로 알려졌다. 영부인 당시에는 공식 역할에만 참석하고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활동에 집중했다. 상도동 자택을 방문한 기자, 관계자들에겐 직접 시래깃국을 끓여주기도 했다.
김 전 대통령이 서거할 때에도 손 여사는 "안 추웠는데 춥다"는 말을 반복하며 남편을 향한 사랑을 드러냈다. 눈에 띄는...
박정희 정부는 ‘산업화’를 이룩했고, 김영삼 정부는 ‘민주화’를 추구했다. 김대중 정부는 ‘정보화’를 강조했으며, 이명박 정부는 ‘녹색성장’, 박근혜 정부는 ‘창조경제’를 국가적 어젠다로 추진했다. 일부 민주적 의견 수렴과정이 부족했던 아쉬움이 있었으나 대체적으로 역대 정부는 박수를 받았다. 입법이 뒷받침되지 못하거나 5년 단임제로 시간이...
김영삼 정부 마지막 해인 1997년의 노사분규 발생건수 78건, 근로손실일수 44만4000일에 비해 크게 증가한 수치다.
‘비즈니스 프렌들리’를 내세운 이명박 정부는 노무현 정부와 정반대의 길을 걸었다. 노사관계에서 ‘법치주의의 확립’을 천명하고 노동시장에서는 ‘유연성 제고’에 중점을 뒀다. 불법 파업에 무관용 원칙이 적용되고 민주노총과 한국노총을...
이는 김영삼 정부 이후 평균 7~9회 특사에 비해 적은 수로, 결과적으로 공약을 어느정도 지킨 모습이다.
한편 문 대통령의 마지막 사면 명단에 포함된 박 전 대통령은 사면 이후 문 대통령과 정부에 감사의 뜻을 표했다.
박 전 대통령은 측근인 유영하 변호사를 통해 “먼저 많은 심려를 끼쳐드려 국민 여러분께 송구스럽다는 말씀을 드린다”며 “어려움이 많았음에도...
김영삼 정부 시절 ‘피는 물보다 진하다’고 하여 전향적인 대북정책을 취하려다 북한 핵문제로 대북정책이 갈팡질팡하였다. 박근혜 정부 때는 한반도 신뢰 프로세스라 하여 이전 정부 대북정책의 장점을 계승한다고 하였으나 결국은 북한붕괴론에 매몰되고 말았다. 문재인 정부는 ‘통일국민협약’이라고 하여 보수·진보·중도를 아우르는 사회적 대화를 실시하고...
15대 대선 당시 김영삼 대통령 후보와 친분이 있거나 정책과 관련된 주식들이 지라시 형태로 주식시장에 유통되면서 시작됐다. 이후 2002년 16대 대선을 앞두고 본격적인 정치테마주가 등장했다.
당시 노무현 후보가 내걸었던 ‘충청도 수도 이전 계획’이 대선을 앞두고 관련 테마주들이 휩쓸었고, 실제 대선 결과 역시 노무현 후보가 승리했다.
2007년 대선은 이명박...
이 후보와 윤 후보는 '가족 리스크'를 의식한 듯 추모식 내내 어색한 기류를 보인 서로 지난달 고(故) 김영삼(YS) 전 대통령 서거 6주기 추도식 때는 무거운 분위기 속에서도 간간이 서로 미소띤 채 대화한 바 있다.
이재명 후보는 이날 "김구 선생과 윤봉길 의사께서 꿈꾸셨던 자주독립의 부강한 나라, 그 꿈을 우리가 반드시 이뤄내야 될 것"이라며...
그중 하나가 ‘김영삼 재평가’라는 책이다. 언론계 출신인 오인환 전 공보처 장관이 쓴 것이다. 그는 김영삼 전 대통령과 임기를 함께한 문민정부 최장수 장관이다. 그의 김영삼 평전은 나름 객관성을 지키려고 애쓴 흔적이 뚜렷하다. 특히 김 전 대통령이 경제를 모른 채 안이하게 대처하다 1997년말 IMF 외환위기(당시는 환난이라 했음)를 맞았다는 세간의 평가에 대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