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은총의 映樂한 이야기] 영화 '그녀(Her)'를 통해 본 시뮬라크르와 휴머니즘

입력 2014-09-01 17: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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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영화 스틸컷)
◆에필로그, 신형철의 '시뮬라크르(Simulacre)를 사랑해

평론가 신형철의 글은 언제나 명쾌했다. 대학 시절 읽었던 김행숙의 시집 '이별의 능력' 맨 뒷장에 실린 평론 '시뮬라크르를 사랑해'는 더욱 그러했다. 영화 '그녀(Her)'를 보는 내내 나는 그 글을 떠올렸다. 글의 전문은 이러하다.

"나는 너를 사랑한다. 네가 즐겨 마시는 커피의 종류를 알고, 네가 하루에 몇 시간을 자야 개운함을 느끼는지 알고, 네가 좋아하는 가수와 그의 디스코그래피를 안다. 그러나 그것은 사랑인가? 나는 네가 커피 향을 맡을 때 너를 천천히 물들이는 그 느낌을 모르고, 네가 일곱 시간을 자고 눈을 떴을 때 네 몸을 감싸는 그 느낌을 모르고, 네가 좋아하는 가수의 목소리가 네 귀에 가닿을 때의 그 느낌을 모른다. 일시적이고 희미한, 그러나 어쩌면 너의 가장 깊은 곳에서의 울림일 그것을 내가 모른다면 나는 너의 무엇을 사랑하고 있는 것인가.

느낌이라는 층위에서 나와 너는 타자다. 나는 그저 '나'라는 느낌, 너는 그냥 '너'라는 느낌이다. 그렇다면 사랑이란 무엇인가. 아마도 그것은 느낌의 세계 안에서 드물게 발생하는 사건, 분명히 존재하지만 명확히 표명될 수 없는 느낌들의 기적적인 교류, 어떤 느낌 안에서 두 존재가 만나는 짧은 순간일 것이다. 나는 너를 사랑하기 때문에 지금 너를 사로잡고 있는 느낌을 알 수 있고 그 느낌의 세계로 들어갈 수 있다. 너를 사랑하기 때문에 지금 너에게 필요한 느낌이 무엇인지를 이해할 수 있고 그 느낌을 너에게 제공할 수 있다. 그렇게 느낌의 세계 안에서 우리는 만난다. 서로 사랑하는 이들만이 느낌의 공동체를 구성할 수 있다. 그러니까 사랑은 능력이다."

'그녀'에서 테오도르 역을 맡은 호아킨 피닉스(Joaquin Phoenix) 역시 직접 쓴 대필편지로 이렇게 말한다. "당신의 옆에서 당신의 시선으로 세상을 볼 수 있어서 행복합니다."

능력만 있다면 컴퓨터 운영체제를 사랑하는 것도 가능한 세상이 온 것이다.

(사진=영화 포스터)
◆비인간적인 음악을 만든 '아케이드 파이어(Arcade Fire)'

영화 '그녀'는 기술과 문명이 발달할수록 개인의 삶은 얼마만큼 피폐해질 수 있는가를 음악을 통해 여실히 드러낸다. 캐나다 출신의 7인조 펑키 밴드 '아케이드 파이어'는 이런 영화의 느낌을 살리기 위해 곳곳에 여러 가지 음악적 장치를 심어놓았다. 예를 들어 울부짖는 일렉의 소리와 고음의 신디사이저, 사이버틱한 각종 기계음과 텐션이 반복되는 단선의 멜로디 같은. 이런 날카로운 음악들 속에 휴머니즘은 빛이 바래고 테오도르의 고독감과 외로움은 극대화된다.

'그녀'의 감독 스파이크 존즈(Spike Jonze)와 아케이드 파이어는 2010년 아케이드 파이어의 뮤직비디오로 처음 만났다. 이후 아케이드 파이어의 팬이 된 존즈는 그들에게 자신의 영화 사운드트랙을 맡아달라고 친히 요청한다. 이렇게 믿음으로 만난 둘은 '그녀'에서 엄청난 시너지를 만들어 낸다. 이에 대해 존즈는 "아케이드 파이어는 우리가 영화 촬영을 하고 있을 때 동시에 음악을 만들었다. 우리가 촬영한 사진이나 동영상을 보내면 그들은 이에 맞는 엄청난 음악들을 만들어 보내왔다"며 "이 때문에 영화와 음악의 DNA와 비주얼, 느낌들이 서로 유기적이고 아름답게 조화를 이루었다"고 설명했다.

(사진=영화 스틸컷)
◆나무로 만든 인간적인 악기 '우쿨렐레'

영화 '그녀'에는 디지털과 아날로그의 대비가 극명하다. 이메일과 손편지, 사만다의 캠과 인간의 눈 등이 그러하다. 음악 역시 그렇다. 전자틱한 비인간적인 일렉에 대응하는 악기는 우쿨렐레다. 나무로 만든 자연적이고 따뜻한 우쿨렐레는 '그녀'에서 가장 인간적인 소리를 들려준다. 우쿨렐레의 소리 말고도 '그녀'에는 노는 아이들 소리, 바람 소리, 물 끓는 주전자의 휘파람 소리 등 인간적인 소리가 많이 등장한다. 이런 소리는 테오도르와 사만다가 교류할 수 있는 중요한 매개체다.

특히 사만다가 테오도르를 위해 만든 10번 트랙 'Photograph'는 중요한 음악이다. 실존할 수 없는 사만다는 테오도르와 함께 할 수 없는 아쉬움을 피아노에 투영한다. 그렇게 만들어진 음악이 바로 "우리가 삶 가운데에 함께 있는 이 순간을 노래 속에 붙잡아 넣은 사진"같은 곡 'Photograph'다. 어떻게 음악이 사진처럼 들릴 수 있느냐고 반문하는 사람들은 반성하시라. 능력이 없는 것이다. 신형철의 글처럼 오직 사랑하는 능력이 있는 자만이 상대방과 느낌의 세계에서 만나 느낌의 공동체를 구성할 수 있다.

무엇보다 가장 아름다운 음악은 보너스디스크에 수록된 'The Moon Song'이다. 목소리만으로 완벽한 볼륨감을 드러낸 사만다 역의 스칼렛 요한슨(Scarlett Johansson)은 우쿨렐레 반주에 맞춘 귀스키(귀염+허스키)한 목소리로 테오도르를 유혹한다. "나는 달 위에 누워있네. 내 사랑, 달에는 내가 있지요. 그곳은 고요하고 별이 가득한 곳. 시간은 모두 사라지고. 우리가 있는 공간은 백만 마일 멀리 떨어져 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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