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正論]정우의 멜로가 이민호보다 설레는 이유- 정덕현 대중문화평론가

입력 2013-11-15 10: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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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들은 화려한 재벌가의 이야기를 보고 싶어할까, 아니면 비슷비슷하게 살아가는 서민들의 이야기를 보고 싶어할까. 과거에는 분명 그 정답은 전자였다. 재벌가에 대한 선망이 더 컸기 때문이다. 우리네 드라마에서 재벌가란 그래서 서민들이 한 번쯤 꿈꿔 보는 판타지의 공간이었다. 회장 아들이 실장님으로 등장해 현대판 왕자님이 되고 그에 의해 천거받는 신데렐라 이야기는 그래서 멜로에 있어서는 전가의 보도처럼 사용된 코드였다.

하지만 이것은 2013년 지금도 여전히 정답일까. 글쎄다. 재벌가에 대한 인식이 과거와 많이 달라졌기 때문이다. 여전히 선망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이들이 있는 반면, 다른 한편으로는 분노의 시선을 보내는 이들도 생겨났다. 이것은 아마도 대중들이 자신의 빈곤과 궁핍이 재벌가들의 부유함과 무관하지 않다는 것을 깨닫기 시작했기 때문일 게다.

2013년은 특히 이런 달라진 시선이 전면에 부각된 해다. 연초부터 불거져 나왔던 이른바 갑을 정서는 그 단적인 예다. 모 기업의 상무가 비행기에서 라면맛이 안 맞는다며 승무원의 뺨을 때렸다는 얘기는 이른바 ‘라면상무’란 이름으로 일파만파 퍼져 나갔고, 임시주차만 가능한 공간에 차를 장시간 주차해놓고 이를 빼 달라는 요구에 호텔 지배원을 폭행한 한 중소기업 회장의 사건은 ‘빵 회장’이란 이름으로 엄청난 후폭풍을 몰고왔다.

또한 아버지뻘 되는 대리점주에게 욕설을 퍼부으며 물건을 강제로 떠넘긴 한 남양유업 사원의 이야기는 소비자들의 거센 반발을 일으키며 회사에 막대한 손해로 이어졌다. 또 ‘그것이 알고 싶다’가 공개한 모 제분회사의 사모님 이야기는 사회적 공분으로 이어지며 성토됐고, 결국 해당 회사 제품 불매운동으로까지 번지기도 했다. 과거라면 혀만 찼을 일들이 이제 대중들이 SNS 등을 통해 모이자 현실적인 힘이 됐고 그 경험은 대중의식을 만들어냈던 것.

이렇게 변화된 대중의식은 동시에 재벌가에 대한 달라진 인식을 만들어낼 수밖에 없다. 재벌가는 더 이상 판타지가 아니다. 그것은 치열한 현실이고 우리네 서민과도 무관한 저들만의 세계가 아니다. 그들이 부를 축적할 수 있었던 것은 어찌 보면 서민들의 피해를 담보로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기 때문이다. 이런 의식을 담아낸 드라마들이 등장했다. ‘추적자’에 이은 ‘황금의 제국’ 같은 드라마가 대표적이다. 이 드라마에서 재벌가는 일종의 절대악이거나 혹은 인간이 사라져 버린 이후 자본기계들이 살아가는 지옥이다. 심지어 ‘결혼의 여신’ 같은 드라마도 재벌가의 결혼이 결국은 비극이 되는 반신데렐라의 모습을 담지 않았던가.

그러니 이런 시대에 초재벌가를 전면에 내세운 ‘상속자들’에 대한 대중의 시선이 고울 리가 없다. 물론 멋진 아이돌들이 나와 손발이 오그라드는 멜로적 상황을 연출하기 때문에 그 마취적 판타지에 잠시 시선을 빼앗기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일 게다. 게다가 김은숙 작가 정도의 필력이라면 시청자들의 마음을 들었다 놨다 하는 게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닐 테니 말이다. 하지만 상상할 수도 없는 자본을 상속받는 그들이 보여주는 일종의 엄살을 서민들이 공감하기란 실로 어렵다. 힘겨운 현실을 살아가는 서민들에게 돈을 내세워 매력을 포장하는 신데렐라 스토리는 심지어 ‘치사한 사랑’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이것은 아마도 ‘상속자들’의 이민호보다 ‘응답하라 1994’의 정우가 더 대중의 가슴을 설레게 만드는 이유일 것이다. ‘상속자들’의 그 으리으리한 저택과 ‘응답하라 1994’의 하숙집을 비교해 보라. 몹시 더운 날씨로 인해 에어컨을 겨우 장만한 나정(고아라)이 집에서 하룻밤이라도 시원하게 자자며 마루에 모두 함께 누워 자는 풍경은 멜로가 얼마나 평등한가를 잘 보여준다. 학벌도 재산도 성별도 지역도 없는 그 마루의 풍경은 요즘 같은 살벌한 현실 속에서 바라보면 마치 파라다이스 같은 느낌마저 준다. 당신은 여전히 재벌가의 이민호가 설레는가. 아니면 하숙집의 정우가 더 설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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