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은행에 개설된 이란중앙은행(CBI) 계좌에서 1조원이 넘는 거액을 해외로 빼돌린 무역업자가 검찰에 적발됐다.
유령회사를 세워 실제 현물거래가 없는데도 중계무역을 하는 것처럼 관계당국과 은행을 감쪽같이 속인 것으로 드러났다.
제3국에 유출된 1조원대 자금의 행방은 파악되지 않고 있다.
◇대리석 무역 '눈속임' = 서울중앙지검 외사부(이성희 부장검사)는 24일 이란과 아랍에미리트(UAE) 두바이 간의 중계무역을 가장해 1조원대 이란중앙은행 자금을 부정 수령하고 제3국에 불법 송금한 혐의(외국환거래법위반 및 관세법위반)로 A사 대표 정모(73)씨를 구속기소했다.
정씨는 2011년 2∼7월 두바이 M사로부터 1조948억원 상당의 대리석 등 건축자재를 구입해 이란의 F사에 파는 것처럼 서류를 꾸민 뒤 한국과 이란 간 원화결제시스템을 악용, 모 시중은행에 개설된 CBI 계좌에서 수출대금 명목으로 돈을 수령했다.
원화결제시스템이란 한국과 이란의 무역대금을 원화로 결제하는 체제로, 미국이 이란과의 달러화 결제를 봉쇄하자 우회결제 수단으로 마련됐다.
이란의 원유 수입대금을 국내 은행의 CBI 주(主) 계좌에 넣어두면 이란에 수출하는 업체가 물품대금을 CBI 자(子) 계좌에서 빼가는 방식이다.
정씨는 1조700억원을 9개국에 몰래 송금하고 170억원의 커미션을 챙겼다. 이 중 107억원은 미국에 만든 회사 계좌로 반출해 부동산, 차량 구입 등에 썼다.
정씨는 두바이에서 100만원짜리 투어멀린(광석)을 들여오며 2천500만달러(298억원)짜리 루비 원석으로 허위 신고한 혐의도 있다.
정씨의 속임수에 전략물자관리원과 한국은행, 시중은행이 모두 속은 것으로 검찰은 보고 있다.
중계무역을 가장하려고 해외 인터넷 쇼핑몰에서 대리석 등 건축자재 사진을 출력ㆍ편집한 뒤 전략물자관리원에 제출해 비(非)금지 무역품목임을 확인받았다. 이란과 두바이 업체 사이의 인보이스(송장)와 계약서도 허위 작성했다.
한국은행은 전략물자관리원 확인서와 무역서류만 믿고 수출대금 수령을 허락했다. 시중은행도 한국은행 허가서와 이란 측 대금 지급지시서를 믿고 자금을 이체한 것으로 드러났다.
검찰 관계자는 "시중은행 관계자들이 공모하거나 범행을 묵인한 것은 없는 것으로 파악됐다"며 "결국 정씨 개인에게 속아 업무처리를 해준 것 같다"고 말했다.
◇사라진 1조원의 행방은 = 검찰 조사결과 정씨가 빼돌린 1조원대 자금은 UAE 등 9개 나라로 송금됐다. 대부분 선진국인 것으로 알려졌다.
검찰은 시중은행이 이란 측에서 받은 지급지시서는 위조되지 않은 점에 비춰 이란 측과 정씨가 공모했을 가능성에 무게를 두고 있다. 돈을 송금한 9개국도 모두 이란 측 관계자들이 지정한 곳으로 드러났다.
검찰 관계자는 "우리가 이란에서 수입한 원유 대금이 국내 은행 계좌에 많이 묶여있다 보니 이란 측에서 이 돈을 활용하고 싶었던 게 아닌가 싶다"고 관측했다.
검찰은 정씨의 범행으로 국내 은행이 금전적 피해를 본 것은 아니라고 설명했다.
결국, 이란측 사업가 다수의 돈이 빠져나간 셈인데, 아직 이란 측에서 이의제기가 들어오지는 않은 것으로 전해졌다.
검찰은 하지만 정씨가 외국환거래법 등 국내 현행법을 위반해 국가적 법익을 손상한 것으로 판단했다. 중계무역을 가장해 외환거래 질서를 어지럽혔다는 것이다.
국제 무역제재를 받는 이란 측 자금 융통을 일종의 수수료를 받고 도와준 것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검찰은 정씨의 커미션 중 상당액을 범죄수익으로 보고 환수조치에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