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성찬의 그린인사이드] ‘귀하신 몸’ 캐디는 근로자가 아니다?

입력 2012-06-28 09:36 수정 2012-06-28 1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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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소득을 올리는 캐디는 여전히 근로자가 아니다. 사진은 대회에 출전한 이소진의 캐디를 개그맨 배동성이 하고 있다. 사진=KLPGT
‘수도 파이프 수리공으로 생계를 유지하는 난장이 아버지, 인쇄소 제본 공장에 나가는 어머니, 우등생이었으나 가정형편으로 학교를 그만두고 인쇄소에 나가는 아들 영수와 영호, 그리고 막내 영희. 이렇게 다섯 식구로 이루어진 난장이 가족은 철거 계고장을 받는다. 아파트 입주권이 나오지만 가난한 철거민들에게 그것은 ‘그림의 떡’이다. 그래서 대부분은 입주권을 팔아서 변두리나 시외로 세를 얻어 나갔지만, 영수네는 세든 사람의 전세금과 명희네서 빌린 돈을 갚기위해 입주권이 값이 조금이라도 더 오를 때까지 버틴다. 명희는 동생 영희의 친구이자 영수와 장래를 약속한 사이였으나 가난에 쪼들려 다방 종업원, 버스 안내양, 골프장 캐디를 맴돌다가 임신까지 하게 되고 결국 자살한다.

마침내 난장이 가족도 기다린 보람이 있었는지 시가보다 높은 가격에 입주권이 팔려서 빌린 돈 십오만 원을 갚고도 십만 원이나 남아 대부분의 철거민들이 몰리는 성남으로 이사가기로 결정한다. 그날 난장이 아버지와 막내 영희는 집을 나간 후 소식이 없다. 아버지는 체력이 떨어져 일을 나갈 수 없게 되면서부터 친구를 따라 써커스 무대에 선다는 환상을 지니고 있었다. 그것이 집을 빼앗겨야 한다는 충격으로 표면화되어 집을 나가게 된 것이다. 영수와 영호는 백방으로 수소문하였으나 찾을 수가 없어서 어쩔 수 없이 남은 세 식구만 이사를 떠난다. ’

소설가 조세희(70)의 대표작 ‘난장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1978년)의 일부 줄거리다. 여기서 캐디가 나온다. 골프장이 별로 없던 시절이다. 골프연습장에도 볼을 놓아주던 캐디가 있던 시절이다.

골프장에서 근무하는 ‘귀하신 몸’ 캐디는 근로기준법상 근로자가 아니라는 판결이 나왔다.

2009년 근로자라는 판결을 뒤집은 것이다.

서울행정법원 행정14부(재판장 진창수)는 최근 경기도 용인 골프장 운영회사 88관광개발과 대표이사 김모씨가 중앙노동위원회를 상대로 낸 부당해고구제 재심판정 취소청구소송에서 ‘부당해고에 관한 재심판정 부분을 취소한다’는 원고 승소 판결을 함에 따라 근로자를 주장했던 캐디가 졌다.

재판부는 판결문에서 ‘캐디는 골프장과 근로계약이나 고용계약을 전혀 체결하지 않았기 때문에 어떠한 보수도 받지 않았다’며 ‘다만, 이용객의 경기보조 업무를 수행한 대가로 이용객들에게 직접 금전을 받을 뿐’이라고 밝혔다. 이어 ‘캐디가 제공한 노무는 원고로부터 골프장의 출입 및 이용권한인 출장 기회를 제공받는 대가에 불과하고, 임금을 목적으로 한 노무제공으로는 볼 수 없다. 그렇다면 임금을 목적으로 사용자와 종속적인 관계에서 근로를 제공하는 근로기준법상의 근로자로 볼 수 없다’고 판시했다.

88CC는 2008년 9월16일 경기진행 지연문제로 경기팀장 우모씨와 마찰을 빚은 캐디 정모씨를 ‘반성하지 않고 회사방침에 저항했다’는 이유로 같은 달 제명하고, 같은해 11월 정씨 해고와 관련해 항의시위를 벌이고 인터넷 게시판에 회사 비방글을 올렸다는 이유로 캐디 52명에게 무기한 출장유보 처분을 내렸다.

이에 정씨 등은 중앙노동위에 부당해고 구제심판을 청구했고, 중앙노동위가 이를 받아들이자 A사와 김씨가 이에 불복해 소송을 냈다.

이런 일은 2000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88CC 캐디 100여명은 근로자인정 문제를 놓고 골프장과 갈등을 빚었다.

노조를 결성한 88CC 캐디들은 노동부로부터 ‘88골프장의 캐디는 근로자로 봐야 한다’는 유권해석을 받아낸 뒤 골프장측에 단체협상을 요구했으나 사측은 노동부의 해석은 말 그대로 해석일 뿐이며 근로기준법상 아직도 캐디는 근로자로 인정되지 않기 때문에 단체협상에 임할 수 없다고 했다.

그런데 재미난 사실은 2009년에는 수원지법에서 캐디를 근로기준법상 근로자로 인정했다는 것. 이에따라 그 당시에는 부당 징계 등 신분상 불이익을 당했을 경우 법적 방어권을 행사할 수 있는 길이 열리는 듯했다. 또 근로기준법상 근로자로 인정되면 산업재해보상보험법에 따라 일반 근로자와 마찬가지로 산재 혜택을 받을 수 있게 된 첫처럼 보였다.

수원지법 민사9부 재판부는 판결문에서 ‘캐디와 회사가 근로계약을 체결하지 않더라도 종속적인 근로를 제공하고 있고 회사의 지시와 일정한 근무시간, 캐디마스터의 총괄관리 등에 비춰 업무내용, 근무시간 및 장소를 정하고 있다’고 대법원 판례를 깨고 근로기준법상 근로자로 판단했다. 재판부는 회사의 위임에 따라 이용객이 경기보조원에게 직접 지급하는 캐디피를 임금으로 인정한 것이다.

국내에서 캐디는 1996년 7월 대법원 판례를 근거로 근로자로 인정하지 않았다.

대법원은 노무공급을 체결하지 않은 점, 봉사료(캐디피)를 입장객이 임의로 정하는 점, 골프장이 지휘 및 감독권을 행사한다고 볼 수 없는 점, 근로소득세를 납부하지 않는 점 등을 종합해 임금을 목적으로 근로를 제공하는 근로기준법 및 산업재해보상법상 근로자로 인정하지 않았다.

이후 경기보조원들은 1993년 노동조합 및 노동관계조정법상 근로자로 인정받으면서 노조를 설립할 수 있었으나 노조 활동을 빌미로 부당한 징계를 해도 법적으로 구제받을 수 없었다.

캐디는 이제 ‘귀하신 몸’이다. 한 달에 250만원 이상 소득을 올리는 캐디가 적지 않다. 이 때문에 남자캐디도 늘고 있다. 강북의 H골프장은 남자캐디가 85%를 넘는다. 수도권 지역의 골프장들도 남자 캐디를 보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캐디에 대한 인식변화가 많이 개선되면서 전문직종으로 각광을 받고 있다.

그러나 아직도 캐디는 잔디를 뽑는 일용직이라는 인식이 강하다. 이 때문에 골프장에서는 각종 대우를 해주면서도 ‘절대로’ 근로자로 인정하지 않는다.

골퍼들이 라운드를 하면서 일정부분 캐디피라는 것을 냈다. 그러다가 어느 날 그린피에 포함됐던 캐디피는 슬그머니 사라지고 팁으로 전환됐다. 그러면서 캐디팁이 현재 12만원까지 올랐다.

골프장은 캐디가 필요하다. 특히 회원제이고 명문 골프장일수록 회원들은 캐디를 원한다. 팁이 부담이 가면서도 캐디를 동행하길 원한다.

그런데 골프장과 캐디사이에 문제가 생기면 소송을 걸고 근로자인가, 아닌가로 싸움을 시작한다.

아파트까지 얻어주고 겨울철 휴장기간에 두둑한 보너스를 챙겨주고 해외연수까지 시켜주는 골프장이 있는가하면 마치 ‘종부리듯’ 하는 골프장도 있다.

골프장이 캐디에 대한 인식을 바꿀 때가 됐다. 근로자이건 아니건 캐디를 하나의 ‘인격체’로 대하고, 같은 가족이라는 개념을 갖지 않고서는 평행선일 수밖에 없다. 솔로몬의 지혜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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