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정의 유통기한 [읽다 보니, 경제]

입력 2026-05-19 2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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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제공=문학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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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우정 변치 말자.

졸업앨범 한 구석에 약속처럼 적어두었던 이 문장이 무색해지는 순간이 있습니다. 누군가는 가정을 꾸리고, 누군가는 커리어의 정점을 향해 달리며 생긴 삶의 격차는 단단했던 관계의 고리들을 느슨해지게 만드는데요. 결국 느슨해진 관계는 대화의 공백을 만들고, 오랜 친구 사이마저 '시절인연'이라는 이름 뒤로 멀어지게 만듭니다. 매일 밤낮으로 연락을 주고받던 친구들이 일 년에 한 번 얼굴 보기도 힘든 사이가 될 때 우리는 말로 다 못할 쓸쓸함을 마주합니다.

경제학에서는 시간이 흐름에 따라 유형자산의 가치가 감소하는 것을 '감가상각'이라고 부릅니다. 우리의 우정 역시 나이가 듦에 따라 자연스러운 감가상각을 겪곤 합니다. 나이가 들수록 왜 친구와 멀어지는지, 이 자연스러운 ‘관계의 감가상각’을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멀어짐을 받아들이는 성장 서사

(사진제공=문학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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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가지 작가의 '서른의 친구'는 서른 중반의 직장인 '은아'을 앞세워 나이가 들며 자연스럽게 멀어지는 관계와 그 속에서 새롭게 시작되는 관계들을 그려냅니다.

주인공 은아에게는 한때 가족보다 가까웠던 단짝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친하다는 이유로 무심코 넘어버린 선과 무심한 말들이 상처로 남았고, 관계는 끝내 이별에 이릅니다. 은아는 '내가 우정을 잘 지키지 못했다'는 자책과 뒤숭숭한 감정에 힘들어합니다.

은아를 괴롭히는 것은 비단 옛 우정에 대한 자책뿐만이 아닙니다. 매일 팽팽한 신경전이 오가는 직장 동료와의 관계, 기대를 안고 나갔지만 어색함만이 감도는 소개팅 상대와의 만남까지, 은아의 일상은 서른이 돼서도 인간관계는 여전히 서툴고 어렵다는 씁씁한 진실을 보여줍니다.

가까움이 늘 위안이 되지 않으며 관계를 버텨내는 일 자체에 엄청난 에너지가 든다는 것을 깨달은 은아는 변해갑니다. 더 다치지 않기 위해 사람들과의 '적정 거리'를 조절하고 감정을 덜 쓰는 쪽으로 자신을 옮겨갑니다. 기업이 리스크를 줄이기 위해 안전마진을 확보하듯 은아 역시 마음의 방어선을 구축하는 셈입니다.

그 과정에서 은아는 새로운 관계의 형식을 알게 됩니다. 모든 것을 공유하는 밀착형 관계까진 아니더라도, 각자의 삶을 열심히 살아가다 가끔 생기는 교집합 안에서만 만나도 충분하다는 것입니다.

감정의 '안전마진'을 찾는 2030의 느슨한 연대

웹툰 속 은아가 선택한 '거리두기'는 오늘날 대한민국 2030 세대의 현실과 맞닿아 있습니다. 최근 청년층 사이에서는 목적 중심의 무겁고 지속적인 모임 대신 가볍고 일시적인 '느슨한 만남'이 빠르게 확산되고 있습니다.

주말에 번개로 모여 감자튀김만 먹고 헤어지는 '감튀 모임'이나, 특정 장소에서 각자 경찰과 도둑 게임을 하고 쿨하게 흩어지는 '경도 모임'이 대표적입니다. 이들은 서로의 이름, 나이, 직장을 물을 필요가 없습니다. 부담 없이 만나고 헤어지기 때문이죠.

이들에게는 외로운 것은 싫지만 관계를 오래 유지할 자신은 없고, 사람은 만나고 싶지만 감정 소모나 인간관계 스트레스로 피곤해지고 싶지 않은 심리가 자리 잡고 있는 것는데요. 정기 모임과 매달 내는 회비 등 지속적인 참여와 강력한 책임감을 요구하던 기성세대의 동호회 방식과는 확연히 대비되는 양상입니다.

실제 통계 지표 역시 이러한 변화를 증명합니다. 시장조사 전문기업 엠브레인 트렌드모니터의 조사에 따르면 오늘날 현대인들이 인간관계에서 느끼는 피로도는 매우 심각한 수준인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조사에 참여한 응답자의 무려 77.3%가 인간관계에서 얻는 만족감보다 스트레스가 더 크다면 차라리 거리를 두는 편이 낫다고 답했습니다. 게다가 아무리 친하고 가까운 친구 사이라 하더라도 최소한의 일정한 거리를 두고 싶다는 응답도 69.4%에 달했습니다.

젊은 세대에게 인간관계는 무조건 지켜내야 할 절대적 가치가 아니라, 자신의 한정된 심리적 에너지와 자원을 효율적으로 배분해야 하는 일종의 '비용 편익 분석'이자 '리스크 관리'의 대상이 된 셈입니다.

완벽한 밀착 대신 '느슨한 연결'

불교 용어 중에 '시절인연(時節因緣)'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모든 일이 적절하거나 결정적인 때가 되어야 이루어진다는 뜻입니다. 한때 온 마음을 다해 친했던 이들과 서먹해지고 우정의 유통기한이 다했다는 느낌이 드는 것은 꼭 누군가가 잘못해서가 아닙니다. 그저 서로의 삶에서 서로가 해줄 수 있는 역할과 온기의 유효기간이 자연스럽게 만료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니 멀어진 관계의 빈자리를 보며 자책하거나 서글퍼할 필요는 없습니다. 과거처럼 모든 일상을 공유하며 끈적하게 밀착하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적당한 거리를 둔 채 서로의 숨구멍이 되어주는 우정 역시 그 자체로 아름다운 관계의 한 형태이기 때문입니다. 예전 같은 밀도가 아닐지라도, 우리가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히 서로에게 위안이 될 수 있습니다.

시절인연에 따라 멀어지는 사람들을 담담하게 보내주는 법을 배우는 것, 그리고 그 과정에서 생겨난 여백을 '나 자신'의 목소리로 채워나가는 것. 그것이야말로 어른이 되어가는 과정에서 우리가 마주해야 할 가장 성숙하고 단단한 삶의 태도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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