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올해 1분기 인수합병(M&A) 시장에서 우선협상대상자 선정 이후 거래가 무산되는 사례가 잇따르면서, 인수 주체의 블라인드 펀드(투자처를 정하지 않고 조성한 펀드) 운용 경력이 핵심 평가 기준으로 떠오르는 분위기다. 단순히 높은 가격을 제시하는 것보다 실제 자금 조달과 거래 종결까지 이어갈 능력과 경험을 갖췄는지가 더 중요해졌다는 것이다.
23일 투자은행(IB) 업계에 따르면 최근 매도자들 사이에서는 블라인드펀드 운용 경험을 이전보다 중요하게 보는 분위기가 감지된다. 시장 변동성이 커지면서 펀딩(자금 모집) 리스크가 부각되자, 반복적으로 자금을 모아 투자·회수를 해온 트랙레코드가 신뢰도를 가늠하는 기준으로 작용한다는 설명이다.
실제 올해 들어 무산된 주요 거래의 상당수는 블라인드펀드 없이 프로젝트펀드 중심 운용사가 인수자로 나섰던 사례였다. 이들 인수자들은 입찰 단계에서는 공격적인 가격으로 우선협상대상자 지위를 따냈지만, 이후 자금 모집 과정에서 난항을 겪으며 거래를 끝까지 매듭짓지 못했다.
레뷰코퍼레이션 매각이 대표적이다. 사모펀드(PEF) 운용사 키움프라이빗에쿼티(PE)와 한국투자PE는 지난해 12월 케이던스캐피탈과 레뷰코퍼레이션의 지분 65.15%를 약 1124억 원에 인수하는 주식매매계약(SPA)을 체결했다. 케이던스캐피탈은 어피니티에쿼티파트너스 대표를 지낸 이상훈 대표가 설립한 신생 운용사로, 당시 가장 높은 가격을 제시하며 우협 지위를 확보했다.
하지만 이후 시장 상황이 급변하면서 자금 조달 길도 엉켰다. 지난달 초 중동발 리스크로 증시가 급락하고 레뷰코퍼레이션 주가도 큰 폭으로 하락하면서, 당초 30~40% 수준으로 평가되던 경영권 프리미엄이 50~60%까지 확대된 것이다. 실제 지난달 3일 1만860원이었던 레뷰코퍼레이션 주가는 4일 하루에만 6% 넘게 하락했고 3월 말에는 1만 원 선 아래로 내려왔다.
SPA상 인수 가격은 고정된 반면 기준이 되는 주가는 시장 변동에 따라 하락하게 된다. 이에 인수자가 부담해야할 경영권 프리미엄도 예상보다 빠르게 불어났다. 당초 30~40% 수준으로 받아들여지던 프리미엄이 주가 급락 이후에는 훨씬 높아 보이게 되면서 투자심의 부담도 커진 것으로 전해진다. 결국 가격 부담이 급격히 커지며 자금 모집이 난항을 겪은 것이다.
레뷰코퍼레이션 거래 규모 자체가 과도하게 큰 편은 아니었다는 점에서 펀딩 난항을 두고 케이던스캐피탈의 블라인드 펀드 경력을 지적하는 시각도 나온다. 케이던스캐피탈을 이끄는 이상훈 대표는 홍콩계 PE인 어피니티에쿼티파트너스에서 10년 넘게 한국 대표를 지내며 시장 내 인지도와 네트워크를 충분히 쌓아온 인물로 평가받아왔다. 맥킨지컨설팅 출신인 그는 어피티니 재직 당시 오비맥주 투자 등 굵직한 거래를 이끌기도 했다. 당초 케이던스캐피탈은 프로젝트펀드로 투자금을 모집해 1124억 원의 인수대금을 납부할 계획이었다.
다만 케이던스캐피탈은 아직 블라인드펀드 조성 경력이 없는 상태다. 업계에서는 대형 글로벌 하우스에서 이미 조성된 대규모 자금을 바탕으로 투자 기회를 집행해온 경험과, 독립 운용사로서 국내 기관투자자(LP)를 상대로 투자 논리를 설명하며 관계를 축적해 자금을 모으는 일은 성격이 전혀 다르다고 본다.
테일러메이드 매각도 유사한 흐름을 보였다. 센트로이드 인베스트먼트파트너스는 본입찰에서 가장 높은 가격을 제시한 미국계 투자사 올드톰캐피탈(Old Tom Capital)을 인수 후보로 선정했지만, 해당 운용사 역시 프로젝트펀드 중심 구조였던 만큼 자금확약서(LOC) 확보에 어려움을 겪으며 거래가 무산된 것으로 알려졌다. 이번 본입찰에서 약 5조 원을 가까운 가격을 써낸 올드톰캐피탈은 고액자산가와 패밀리오피스 성격의 투자자들이 참여하는 벤처클럽 기반 자금 구조로 운영된다.
이처럼 단순 '가격 중심'으로 우협을 선정했다가 클로징 단계에서 변수가 발생하는 사례가 이어지면서, 매도자들의 시각도 변화하는 모양새다. 과거에는 프로젝트펀드를 기반으로 한 공격적인 베팅이 통했다면, 최근에는 자금 동원력과 추가 대응 여력까지 함께 고려하는 분위기다.
블라인드펀드 자체의 운용 난도가 프로젝트펀드보다 훨씬 높다는 점도 이런 평가 변화의 배경으로 꼽힌다. 프로젝트펀드는 특정 자산 인수를 위한 일회성 구조인 만큼 관리가 비교적 단순하지만, 블라인드펀드는 다수의 출자자(LP)를 상대로 정기 보고와 자산 평가, 세무·법률 이슈 대응, 투자 비중 관리 등을 상시적으로 수행해야 한다.
특히 해외 LP가 포함될 경우 영문 보고와 규제 대응 등 추가 관리 요소도 크게 늘어난다. 펀드 규모가 커질수록 단일 투자 한도와 자산별 비중 조절, 후속 자금 대응까지 함께 고려해야 하는 만큼, 블라인드펀드 운용 이력을 단순한 자금 모집 경험이 아니라 조직력과 내부 관리 체계를 보여준다는 시각이다.
블라인드펀드 트랙레코드가 운용사의 위기 대응력을 가늠하는 핵심 지표가 되기도 한다. 블라인드펀드를 운용해온 하우스는 시장 상황 변화에도 추가 출자나 구조 조정 등을 통해 대응할 여력이 있는 반면, 프로젝트펀드 중심 운용사는 딜별로 자금을 새로 모아야 하는 구조상 변동성에 취약할 수 있다는 이유에서다.
IB업계 관계자는 "블라인드펀드를 꾸준히 운용해온 곳과 그렇지 않은 곳에 대한 시장의 신뢰 차이가 분명히 존재한다"며 "딜을 실제로 클로징할 수 있는지에 대한 검증이 한층 까다로워진 상황"이라고 말했다.
PEF 관계자도 "과거에는 높은 가격을 써내면 우협 선정까지는 어렵지 않았지만, 지금은 그 이후가 더 중요해졌다"며 "블라인드펀드 운용 경험이 다시 주목받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시장이 원하는 건 가격이 아니라 확실한 집행력"이라고 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