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트럼프 2기 출범 후 100일이 지났다. 트럼프는 파격적인 관세 정책을 비롯한 ‘미국 우선주의’ 정책의 파급력으로 세계를 거대한 실험실로 만들었다. 출렁이는 금융시장에 손해를 본 투자자들, 관세 위험에 촉각을 곤두세운 기업 관계자들처럼 통상 분야에 집중하는 연구자들에게도 악몽 같은 100일이었다. 직접적인 대미 수출뿐만 아니라 해외 패키징 공장에서의 수출 여건도 동시에 악화되면서 우리나라의 대응력 역시 시험대에 올랐다.
우선 협상 대상국으로 지목된 우리나라는 ‘2+2 통상 협의’를 통해 이번 협상의 큰 방향에 대해 합의했다. 이에 따라 시장 접근성과 관련한 관세 및 비관세 조치, 트럼프가 국가안보와 동일시했던 경제안보, 한미 간 투자 협력, 트럼프가 민감하게 반응하는 환율 등 네 가지 분야에 대해 중점적으로 논의하게 될 것이다. 곧 실무 협의를 통해 세부적인 사항을 다뤄야 하겠지만, 큰 틀에서의 방향성이 설정되었다는 점에서 이번 협의는 큰 의미를 가진다.
‘7월 패키지’ 마련을 위한 향후 협상 과정은 온갖 불확실성을 뒤로하고 누군가는 이득을, 누군가는 손해를 보는 제로섬 게임과 같은 난제를 풀어야 하는 험난한 길이 될 것이다. 반도체, 자동차, 철강 등은 우리나라의 주요 수출 품목이지만, 해당 품목들은 ‘후퇴는 없다’는 포고령에 명시된 제232조 관세 대상이기에 트럼프 2기 행정부의 입장을 바꾸는 데는 상당한 어려움이 예상된다. 이 와중에 금융시장 불안과 경기침체 우려로 인해 미국이 스스로 관세 정책을 후퇴시킬 가능성도 제기된다.
무엇을 얻고 무엇을 내줄지의 ‘변수’를 정하고, 협상 환경을 둘러싼 ‘파라미터’를 따져보는 것도 물론 중요하다. 하지만 이런 때일수록, 이번 한미 간 협상을 서로의 부족한 부분을 채워주는 계기로 삼는 것이 중요하다. 한미의 산업 구조는 이미 긴밀한 보완 관계를 형성하고 있으며 정책적 지원을 통해 더욱 발전시켜 나갈 여지도 충분하다.
과거 우리 정부는 자금 지원 등 산업정책에 대해 다소 소극적인 태도를 보여왔다. WTO 보조금 협정 위반 우려와 더불어, 트럼프 2기 행정부 역시 ‘미국 우선 통상 정책 각서’에서 각국의 불공정한 보조금 문제를 지적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패키지 협상 중인 지금은 상황이 다르다. 이번 협상을 계기로 상호 경제안보 강화를 위한 한미 공동 산업정책 구상을 논의함으로써 그동안 추진하지 못했던 국내 산업 경쟁력 강화를 위한 다양한 조치를 미국과의 협의를 통해 제시할 기회로 삼을 수 있다.
트럼프 대통령이 강조하는 소형모듈원자로(SMR) 분야가 대표적인 예다. 두산에너빌리티, 삼성물산, GS에너지, SK이노베이션, 현대건설 등은 뉴스케일, 테라파워, X-에너지, 홀텍 등과 함께 미국 내 SMR 도입을 위한 다양한 프로젝트에서 협력하고 있다. 그러나 뉴스케일의 아이다호 프로젝트가 비용 상승 문제로 취소된 사례에서 보듯 가격 경쟁력이 중요한 과제가 될 수 있다. 테슬라가 고가의 로드스터와 모델S를 통해 초기 자금을 확보한 뒤 모델3의 양산을 통해 가격 경쟁력을 확보해나간 것처럼, SMR도 양산체제가 갖춰지기 전까지는 비용 문제가 걸림돌로 작용할 수 있다. 한미 공동 산업정책을 통해 기업들이 지속적인 투자를 이어갈 유인을 제공하고, 양국에 상용화 사례를 마련함으로써 향후 제3국 공동 진출로 이어질 수 있는 가능성도 존재한다.
방산 분야 역시 우리나라의 우수한 제조 역량을 토대로 미국 내 라이선스 생산 기회를 확대하고, 퇴역 중인 미국 무기를 한미 간 새로운 수출 기회로 전환할 수 있도록 협력을 도모할 수 있다. 이러한 논의는 평상시에는 제기하기 어려운 주제이므로 이번 패키지 협상을 새로운 기회의 장으로 삼아야 한다.
이 외에도 조선, 에너지 및 인프라, 반도체, 배터리 등 다양한 분야에서 한미 공동 산업정책을 통해 상호 윈-윈 관계를 구축할 수 있는 잠재력이 존재한다. 트럼프 2기 행정부 출범 이후 100일간의 폭풍이 지나갔음에도 여전히 볕 들 기미는 보이지 않지만, 이번 고난을 새로운 기술 도입과 시장 개척을 위한 교두보로 삼을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