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 딸내미, 쪼매 있다가 신랑 따라 일본갑니더. 제가 짜달시리 뭐를 해줄 형편은 못 되고, 우리 땅 쌀 맛이라도 뵈주고 싶습니더. 그거라도 멕이가 보내고 싶어예.”
애플TV 드라마 ‘파친코’에서 결혼한 선자를 일본으로 보내는 양진(선자 어머니)의 마음이 담긴 대사였는데요. 떠나기 전 우리 땅에서 난 쌀 맛을 맛보게 해주고 싶다는 어머니의 간절함도, 일본 관리에게 보내기 위해 우리 땅에서 난 쌀을 못 준다는 그 현실도 모두 생경한데요. 그런데 지금, 그 쌀이 일본으로 가고 있습니다. 이번에는 ‘수출 신고서’를 달고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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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 1920년대 일제강점기 시절 일본은 ‘산미증식계획’을 통해 조선에서 쌀을 대량 수탈했습니다. 이는 표면적으로는 조선의 식량 생산 증대를 위한 정책으로 포장됐지만, 실상은 일본 본토의 식량난을 해결하려는 수탈 정책이었는데요. 전라남도, 평안남도 등 조선의 곡창지대에서 생산된 품질 좋은 쌀은 일방적으로 일본으로 반출됐고, 조선인들은 남은 하품질 쌀이나 보리·조 같은 잡곡으로 연명해야 했죠.
일본 도시의 노동자, 군인들이 먹는 밥은 조선 땅에서 나온 백미였고, 조선 아이들은 그 백미를 구경조차 하지 못했는데요. 앞서 설명한 드라마 ‘파친코’ 속 상황이 나온 이유였죠. 단지 식량을 넘어 ‘지배’와 ‘차별’의 상징이 됐던 그 시대의 쌀이란 존재였습니다.
일본은 쌀, ‘백미’에 대한 자존심이 상당한데요. 일본은 ‘하얗고 깨끗한 백미’를 문명과 부의 상징으로 여겨왔습니다. 메이지 유신 이후 도시화가 본격화되면서 백미는 상류층의 식탁을 넘어 군대와 병원 식단까지 퍼졌고, 이른바 ‘근대인의 식사’로 자리 잡았죠.
하지만 정백 과정에서 비타민 B1이 제거되면서 심각한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군대에서 각기병이 창궐해 러일전쟁 당시 수천 명이 전투 불능에 빠졌고, 한때 전사자보다 각기병 사망자가 많을 정도였는데요. 그럼에도 군인들은 백미를 포기하지 않았을 정도로, 백미 사랑이 엄청났습니다. 이 백미에 대한 집착은 오늘날까지 이어졌는데요. 등록된 쌀 품종만 900종 이상, 지역별 브랜드미 경쟁도 치열합니다. 우리도 알고 있는 쌀 품종인 고시히카리, 아키타코마치, 유메피리카 등은 모두 그 자존심의 산물인 셈이죠.
그런데 그 ‘백미 자존심’을 가진 일본이 이제는 한국 쌀을 사가고 있는데요. 이유는 명확합니다. 일본 쌀이 너무 비싸기 때문이죠. 일본 총무성이 18일 발표한 ‘3월 소비자물가’에 따르면 일본 전국 평균 쌀값은 5kg당 4214엔(약 4만2000원)으로, 전년 동월 대비 92.1% 올랐는데요. 1971년 1월 이후 54년 만에 가장 큰 폭의 상승률입니다. 도쿄 등 일부 상점에서 판매되는 쌀은 1kg당 1000엔(약 1만 원)이 넘는 경우도 허다한 것으로 알려졌죠.

왜 이렇게 된 걸까요? 먼저 기후위기로 인해 일본 쌀 작황이 흔들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상고온, 집중호우, 태풍으로 인한 피해가 매년 누적되며 수확량이 감소했죠. 이어 농업 고령화로 인해 쌀 생산 기반 자체가 무너졌죠. 일본 농민의 평균 연령은 67세. 후계자 없는 논이 늘고 있습니다. 또 일본 정부의 수요 예측 실패와 생산 조절 정책이 수급 불균형을 심화시켰는데요. 쌀 구매량이 폭증하던 지난해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고 사태를 관망하다 올해 3월에야 정부 비축미 21만t을 방출했죠. 이후 10만t을 추가 공급한다고 했지만, 이미 가격이 한참 오른 뒤였습니다.
이런 가운데 한국을 찾은 일본 관광객들 눈에 ‘한국 쌀’이 들어오게 된 건데요. 이제 한국 대형마트에서 10kg 포대를 사 들고 비행기에 직접 싣거나, 자택으로 택배를 보내는 장면이 늘어났죠. 한국에서 쌀을 사서 일본으로 돌아가려면 무거운 쌀 포대의 무게를 감당해야 할 뿐 아니라 검역을 받아야 하는 불편까지 있지만, ‘저렴함’이 이 모든 것을 감내하게 했는데요. 질병관리청에 따르면 올해 3월 이후 쌀 검역 접수가 한 달에 1명 있을까 말까 한 수준이었지만 3월 이후 20명 정도로 늘었고, 대부분이 일본인 관광객이었습니다. 이들의 입을 타고 “한국 쌀이 반값인데 맛도 괜찮다”는 사회관계망서비스(SNS) 후기가 확산되면서, 쌀은 ‘한국 여행 쇼핑 리스트’의 고정 멤버가 됐죠.
결국, 한국의 쌀 수출이 본격화됐는데요. 농협인터내셔널과 연합뉴스 등에 따르면 일본에 판매용 쌀 22t 수출을 추진합니다. NH농협무역의 일본 지사인 농협인터내셔널은 1999년 설립 이후 이번에 처음으로 쌀을 한국에서 수입했는데요. 지난달 쌀 2t을 일본으로 수입해 이달 판매했고, 다음 달 중에 10t을 더 한국에서 들여올 예정이죠. 추가로 10t의 수입 시기 등을 조율 중입니다. 일본에 한국 쌀이 판매된 것도 2011년과 2012년 동일본 대지진 때 구호용을 제외하고 이번이 처음인데요. 물론 앞선 수탈도 제외입니다. 1990년 한국 쌀에 대한 일본 수출 통계를 시작한 이래로 35년 만에 첫 수출이죠.
전남 해남군도 3월 일본에 수출한 해남 대표 쌀 브랜드 ‘땅끝햇살’ 물량 2t이 현지에서 전량 완판됐다고 밝혔는데요. 이달 10t이 또다시 선적된 데 이어 향후 10t을 추가로 수출할 예정입니다.
한국 쌀의 일본 가격은 관세와 배송료 문제로 일본에서 10㎏당 9000엔(한화 약 9만 원) 전후로 판매되는데요. 일부 일본 극우 세력은 “한국 쌀을 왜 먹냐”며 반감을 드러내며 불매 운동까지 벌였지만, 비슷한 맛 수준에 일본 쌀 가격보단 약 10% 저렴한 가격, 사상 초유의 쌀값 폭등 상황 속 미리 구비해 놓으려는 심리가 더해서 ‘완판’ 행진 중이죠.

이런 상황은 한국 입장에서도 참 반가운데요. 한국은 쌀 소비 감소와 공급 과잉으로 어려움을 겪어왔습니다. 수요는 줄고, 재고는 늘어나면서 정부는 매년 보관·폐기 비용 부담에 시달렸죠. 통계청에 따르면 지난해 (예상)생산량은 365만7000t으로 추산량 360만7000t보다 5만t가량 초과 수요가 발생했는데요. 결국, 초과분은 정부가 농가소득 보전과 식량 안보 등을 이유로 남는 쌀을 사들여(공공비축) 수습합니다. 공공비축 물량은 2021년까지 35만t 내외를 유지하다 2022년 45만t, 2023년 40만t, 2024년 45만t에 달했는데요. 그렇기에 일본 수출은 단순한 외화벌이가 아니라, 국내 농가 소득 보전과 국산 쌀의 수급 균형 회복의 기회가 됐습니다.
쌀가루·떡·쌀국수·쌀과자 등 K푸드 가공식품에 이어 ‘진짜 쌀’이 나서는 중인데요. ‘뺏긴 밥상’이 ‘수출 자부심’이 된 한국의 쌀, 이제 그 ‘한반도 밥맛’이 ‘정당하게’ 바다를 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