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채운의 경영직설] 중견기업의 오너 리스크 ‘자만과 불통’

입력 2025-04-23 18: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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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채운 서강대 경영학과 명예교수

외형 성장했지만 경영은 中企수준
시스템 관리 없이 1인 지배 머물러
폐쇄적 기업문화 깨야 혁신 살아나

몇 년 전 어느 회의에서 대기업 임원 출신 중견기업 사장을 만난 적이 있다. 마침 일주일 후에 그 회사의 회장을 본사에서 면담하기로 약속해 그때 같이 보자고 했다. 잘 알겠다는 답변을 듣고 회사에서 다시 만나기로 하고 헤어졌다.

그 이후 약속한 날에 그 중견기업 회장실을 방문해 회장을 만났지만, 그 사장은 나타나지 않았다. 면담을 마치고 나오다가 로비에서 사장을 마주쳐 반갑게 인사하며 물어보았다. “회장님 만난다고 이야기했는데 왜 안 오셨냐”고. 그랬더니 조심스럽게 하는 말이 “회장님이 부르지 않으면 갈 수 없다”고 하였다. 놀라웠다. 자기가 아는 손님이 회사에 찾아 왔는데 회장이 부르지 않으면 사장이 회장실로 가서 인사도 할 수 없다니. 사장이면 회사에서 2인자인데 회장과 거리가 그렇게 먼지 몰랐다.

우리나라 기업의 회장실 문턱은 높기로 유명하다. 사장이나 임원은 사전에 비서실 통해 면담을 요청해야 회장을 만날 수 있다. 회장에게 직접 전화나 연락하고 찾아가는 임원은 드물다. 수시로 회장실에 불쑥 찾아갈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다. 직계나 친인척의 혈연관계가 아니면 누구도 회장실을 편하게 드나들지 못한다.

한국적 기업문화에서 회장은 권위적이다. 그중에서도 중견기업 회장은 제왕적이다. 대기업만 해도 회장은 선대로부터 경영권을 승계받은 2세나 3세로 기업의 성공이 전적으로 자신의 공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부모 잘 만난 덕에 총수 자리에 오른 대기업 회장은 겸손하지도 않지만 오만하지도 않다. 하지만 중견기업 회장은 대부분 1세대 창업자로 오로지 자신의 노력만으로 당대에 매출액이 몇천억 원에 이르는 중견기업을 일구어냈다.

소상공인에서 시작해 고비마다 탁월한 경영능력을 발휘해 굴지의 중견기업을 이룩한 성취는 대단하다. 혼자서 수많은 의사결정을 내리며 기업을 성장시킨 중견기업 회장의 자신감과 자부심은 하늘을 찌른다. 과거의 전설적인 1세대 기업인들에게서나 찾아볼 수 있는 카리스마가 넘친다. 그러나 회장의 과도한 자신감이 이제는 중견기업 성장의 걸림돌이 되고 있다.

대기업과 달리 중견기업은 회장 1인 중심으로 모든 것이 돌아간다. 대기업은 계열사가 많고 사업이 다양하며 이질적이라 회장이 일일이 관여하지 못한다. 대규모 투자나 인수합병(M&A)은 회장이 결정하지만, 일상적 경영은 대표이사에게 위임하며 시스템에 의해 관리가 이뤄진다.

그러나 중견기업은 창업자이자 1세 경영자인 회장이 여전히 경영권을 쥐고 흔든다. 처음부터 회사의 기틀을 다지며 수십 년 동안 사업을 이끌어온 회장은 세세한 부분까지 헤아리고 통찰한다. 업무에 빠삭한 중견기업 회장은 경영을 임원에게 맡기지 않고 본인이 직접 모든 것을 챙긴다. 심지어 임원의 법인카드 지출결제까지 살펴보는 회장도 있다고 한다.

중견기업 회장이 권한을 위임하지 않는 이유로 임원의 능력에 대한 신뢰가 부족하다는 것을 꼽기도 한다. 대기업과 중견기업 임원은 구성과 성분에서 차이가 있다. 대기업 임원은 대부분 공채 출신으로 내부에서 치열한 경쟁을 뚫고 능력과 성과를 인정받아 경영자로 선발된다. 오랜 시간 회사에 근무해 사정을 잘 알며 오너로부터도 신임을 받는다. 하지만 중소기업에서 출발한 중견기업은 인재 풀이 빈약해 외부에서 경영인력을 조달한다. 주로 대기업 경력의 임원을 영입하는데 이런 외부 출신 경영자는 검증이 안 되었고 회장의 신임도 두텁지 않다.

대체로 중견기업은 대기업 출신 임원을 데려다 몇 년 쓰고 교체한다. 한번 써보고 마음에 안 들면 다른 사람으로 바꾸는 것이다. 중견기업 중에는 대기업 임원의 무덤이라 불리는 곳이 있다. 대기업 임원들이 가서 1년을 채 버티지 못할 만큼 수명이 짧다. 그러니 대기업 출신 사장이 회장을 무서워하며 회장실에 얼씬도 하지 않는 것이다.

중견기업은 중소기업과 대기업 사이에 놓인 중간적 기업으로 규모뿐 아니라 경영도 어중간하다. 대다수 중견기업은 규모는 성장했지만 경영은 중소기업 수준에 머물러 있다. 인재도 빈약하고 시스템도 미흡하다. 내부 인력을 키우지도 않고 외부 인재를 활용하지도 못한다. 시스템보다는 회장 1인에 의한 경영에 치우친다. 당연히 회장 개인의 능력을 넘어 기업이 성장할 수 없다. 회장의 독단적 의사결정에만 의존하다 보니 창의적 혁신이 싹트지 못한다. 회장 의견에 아무도 이의나 반대를 제기하지 못하니 리스크 관리도 안된다. 회장의 판단이 올바르면 대박이지만 잘못되면 쪽박이다.

중견기업이 대기업으로 성장하지 못하는 원인으로 재벌기업의 갑질, 정부의 규제, 정책지원 부재 등을 거론하지만 실상은 내부 요인이 더 크다. 중견기업을 성공으로 이끈 회장의 경륜과 역량이 강점인 동시에 약점으로 작용한다. 굳게 ‘닫힌 회장실’이 상징하는 폐쇄적 기업문화에서 성장도 멈추고 혁신도 사라진 중견기업은 대기업과 중소기업 사이를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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